죽기 전에 꼭한 번 가봐야 할 곳/주산지 새벽
누가 나에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을 묻는다면…….
여행관련 책자나 홍보문구에 보면 가끔, '우리나라에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어디 어디' 라는 제목을 보곤 한다. 아마도 많을 것이다. 그러한 곳 들을 내 두 발로 일일이 확인 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 기준에서 보면 나열 해놓은 그 곳들이 아직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될 만큼 큰 감동을 준다거나, 그만한 가치를 가져다 줄 곳들을 그다지 많이 찾지 못했다면 내가 시건방을 떨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로 내 발길이 닿았던, 우리나라의 모든 자연이 죽기 전에 꼭 한번 쯤 둘러 봐야할 그런 곳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다녀본 곳 중에서 굳이 하나를 우선 내어 놓으라 한다면 바로 여기, 주산지만큼은 꼭 가봐야 하지 않을까. 그것도 연둣빛 나뭇잎들이 몽글거리며 그림자를 못 속에 깊이 뿌리박아 놓고, 그 위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이 봄날의 새벽에 말이다.
전날 밤, 일찌감치 주왕산 근처에 숙소를 잡는다. 해뜨기 전에 도착하려면 한 밤중에 부산을 떠느니 근처에서 움직이는 것이 좀 나으리라 싶어서다. 그러나 꼭두새벽부터 부산을 떨기는 마찬가지다. 새벽 세시부터 요란스럽게 준비를 해댄다. 필름은 잘 챙겼는지, 주산지 촬영의 필수항목인 삼각대는 어디 가지 않고 잘 매달려 있는지, 배터리 여분은 있는지, 삼각대와 단짝인 릴리즈는 어느 구석에 들어 앉아 있는지 꼼꼼하게 살핀다.
여행을 하며 사진 자체를 얻기 위한 목적이 이렇게 많은 비중을 차지 한 적도 없을 듯 하다. 내 여행길에 사진이란, 단지 자료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줄 뿐이지 작품(?) 이라는 개념은 아주 미미 했었다. 그러나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봐야 될 곳 중의 하나라고 내가 지정한 이상 거기에 걸 맞는 그림이 한 장 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둑한 주차장에 커다랗고 길쭉한 물체들이 꽉 막고 서 있다. 관광버스다. 예상은 했었지만 벌써 관광버스가 두 대나 서있고 승용차들은 주차장을 메우다시피 하고 있다. 이럴 땐 꼭 작년 부처님 오신 날에 '봉암사' 가던 생각이 난다. 새벽 네 시도 안 된 시간에 이 산중에 누가 오랴 싶어 내가 가장 먼저지 않을까 했던 생각이 또 허방다리를 짚고 만다.
한 밤중에 도착 했는지 여기저기 차안에서 얇은 담요를 덮고 아직은 자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밤을 지새우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진 한 장을 위해서다. 날이 조금 더 밝아지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못이 있는 쪽으로 난 길을 향해 어둠속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주차장에서 못까지는 아주 약간의 오르막길. 이 길을 십여 년 전부터 매년 걷다시피, 그것도 일년에 두어 번씩 했지만 이 시간에 걷기는 처음이다. 나도 참 어지간하다. 새벽의 주산지가 어떠한지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그 많은 걸음을 하면서도 이제야 진정한 주산지의 모습을 찾는지 모를 일이다. 미리 말했지만 내 여행길에 사진작품(?) 이란 개념이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게으른 핑계일는지도 모르겠다.
알싸한 새벽공기는 더욱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정신을 맑게 하고, 길 아래 계곡엔 희끄무레한 어둠속에서도 손 담그면 깨질듯 맑은 물이 확실히 보인다. 너무 맑으니 어둠속에서도 그 존재가 나타난다. 이 길을 이 시간에 걷는 것만으로도 주산지를 찾는 보람은 충분히 있지 않을까. 걸으며 가만히 생각해 보길, 십여 년 전쯤 처음 이 길을 걸을 땐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만큼 인적 뜸했고 물에 잠긴 왕버들 숲이 전해주는 느낌은 으스스하고, 음산하기까지 했었다.
당시만 해도 찾는 이 많지 않았으니, 그저 산골의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하나의 저수지였을 뿐. 저수지 바로 옆의 공터가 주차장 이었었다. 이렇게 알려지기 전 까지는 아마도 주왕산이라는 명산의 위력에 밀려 뒷방을 차지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에 주왕산에 가면 주산지 광고간판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었다. 요즘처럼 좋은 사진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싶다.
2001년인가……. 그쯤, 가을이 다가올 무렵에 한번 들렀더니 물위에 널따랗게 마루바닥을 짜 놓고 무슨 공사를 하는데 '아…….여기다가 절을 짓고 있구나.' 할 정도로 고즈넉하고 깊게 느껴지던 곳이다. 영화 '봄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촬영 세트 공사를 할 때였었다. 아무 생각 없이, 세트를 짓고 있는 장면을 몇 컷 찍어놓고 다 지어진 뒤에 또 와서 찍어 놓고 했던 것이 나중에 영화속에서 그 그림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젠 철거되고 없으니 나에게는 꽤 귀한 사진이 될 수도 있겠다.
영화 촬영지로서 조금씩 알려져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국내 한 방송사의 주산지의 사계절을 담은 프로그램이 나가고부터는 봇물 터지듯 사람들이 밀려온다. 가만히 보면 대개가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다. 특히 이 꼭두새벽에 몰려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다. 낮에는 일반 관광객도 이젠 주왕산 못지않게 많이 찾는 모양이다.
마냥 편한 산책길 같은 흙길을 이런 저런 반추로 시간을 메우며 걷노라니 어느 듯 주산지가 눈앞에 다가와 있다. 긴장이 조금 된다. 왕버들을 비롯한 물속에 잠긴 나무들은 물론이고, 못을 빙 둘러싼 산들의 나뭇잎 색깔은 연한 연둣빛을 띠고 있을까? 가장 핵심 포인트인 물안개는…….
두근거림으로 예전에 주차장으로 사용하던 못 옆의 너른 공터에 올라서니 고요한 새벽 호수에는 이미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는 중이다. 기대에 비해서는 물안개가 조금 적게 피어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이만하길 어딘가 싶어 고맙다. 그 위로 몽글거리는 연록의 빛깔들도 희미한 여명 가운데에 분명히 서있다.
물에 잠겨있는, 예전의 으스스하던 버들 숲은 온통 연록의 향연을 펼치며 새벽을 열고 있고, 주변 산비탈에 유난히 많은 산 벚꽃들마저 잔잔히 머물러 있는 새벽 물위에 얼굴들을 비춰 보느라 그 분홍빛을 더욱 밝히며 깊숙이 담가 놓았다.
흔히 경이로운 풍경을 보게 되면 입이 딱 벌어진다고 하는가. 그러나 입마저 벌어지지 않는다. 잔잔하게 스며드는 이 감동은 딱히 표현할 말이 없다. 그저 자연이 주는 큰 선물에 감사할 뿐이다. 그러나 잠시 뒤에 펼쳐지는 공연에 비하면 지금 보이는 이 풍경은 단지 예고편에 불과 하다는 것을…….
못 길을 따라 다다른 전망대는 이미 카메라 부대가 삼각대를 펼친 채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고, 목책 아래쪽도 웬만한 자리는 더 부지런한 사람들로 인해 송곳하나 꽂을 자리도 없어 보인다. 더러는 이리저리 자리를 찾아 부산하게 종종걸음을 치는 이도 있다. 무거운 배낭에 삼각대까지 들고 바삐 움직이려면 그 것도 쉽지 않을 터. 해 뜨기 직전부터 직후까지의 짧은 시간에 좋은 작품을 얻으려면 여러 곳 움직일 시간이 부족하니 좋은 포인트를 잡는 것이 중요 할 것이다. 처음 찾은 사람들이라면 더욱 헤메일터이다. 나도 그리 움직여야 한 컷쯤은 얻을 텐데 도무지 무덤덤하고 걸음이 느리다.
경륜(?)이 어디 가겠는가. 물안개만 없었다 뿐이지 그 동안 수도 없이 다닌 이곳에 내 한 몸 사진 찍을 만한 곳 정도 봐 두지 않았을까. 그런 자리가 없다 하더라도 빈자리 아무데나 꿰고 앉아, 보이는 것에 최선을 다해 담으면 그만 아닌가. 저마다 구도를 선택하는 눈이 다르니 전망대를 제외하고는 진을 치고 있는 자리도 가지각색이다. 어쩌면 최선의 자리에서 밀려서 차선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눈엔 최선이 곳곳에 많이 보인다. 나야 새벽 물안개 피어있는 주산지라는 그림만 얻으면 되니 그리 안달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예전의 구도를 떠올리며 느긋하게 몇 컷 담고는 일찌감치 둑으로 발길을 옮겨 놓는다. 해뜨기를 기다리기 위함이다.
호수에 물안개 피는 곳이 어디 주산지 밖에 없었겠는가? 왜 주산지의 물안개에 광분(?) 하다시피 하는가. 주산지의 물안개는 한 가지 다른 절묘함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봄과 가을의 새벽에 물에 잠겨있는 버들과 한데 어우러지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신비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왕버들을 비롯한 물에 잠겨 있는 모든 나무들이 비춰주는 물속의 반영은 여느 곳에서 볼 수 없는 절경을 이룬다. 거기다가 물가에 바싹 붙어있는 산의 경사가 급하니 봄철이면 연록의 몽글거리는 나무들과 연분홍 산�꽃이 수면에 너무 깨끗하게 반영이 된다. 이 반영은 수면을 단숨에 거대한 캔버스로 만들어 버리며, 어느 누구도 그려낼 수 없는 한 폭의 유화가 된다.
특히 해뜨는 위치도 절묘하다. 버들 숲을 이루고 있는 뒤쪽에서 해가 떠오르며 뿌리는 빛과 호수와, 연록의 잎들, 그리고 몽환적인 물안개가 한데 어우러지며 펼치는 빛과 그림자의 향연은 극치에 다다른다. 둑 위에서 해뜨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명암은 더욱 간격을 벌리며, 빛과 어둠이 서로 물러서지 않으려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왕버들의 휘어진 가지 끝에서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음이 보인다.
시간이라고 하기엔 너무 길다. '찰나'라고 해야 적당할 그 짧은 시간에 변화하며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준다. 이때쯤이면 환상적, 몽환적, 황홀경 같은 이러한 단어들만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을 것이다.
이제 가을의 새벽이 또 남아있다. 혹자는 봄 빛깔의주산지가 좋다고 하고, 어떤 이는 가을의 주산지야 말로 완벽 그 자체라고도 말한다. 내 생각엔, 빛과 어둠이 왕버들의 가지 끝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버티고 있듯이, 봄과 가을 중에서 어떤 것도 손을 들어줄 수가 없다. 다 좋으니 말이다.
"두고 가기에 차마 발걸음이 떼어지질 않는다."
둑 위에서 내 옆에서 자꾸만 뒤돌아보던 한 아주머니가 발길을 돌리며 하는 말이 와 닿는다.
누가 나한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될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주산지의 새벽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2008. 4. 27 새벽 / 청송 주산지에서-
가는 길 :
서울방면에서는
서안동 나들목으로 빠져서 안동시내를 통과하여 '영덕'방면 으로 34번 도로를 따라가다 '안동대'를 막 지나면서, 우측 다리를 건너 '길안' 방면 35번 도로를 따라 ‘길안’에 도착하면 좌회전하여 914번 지방도를 이용하여 청송으로 들어간다.
청송에서는 이정표를 따라 우회도로로 10여분 가면 주왕산 입구 삼거리. 계속 직진하여 15분쯤 가면 부동면에서 다리 건너기전에 좌측으로 주산지 들어가는 안내판이 보인다.
대구방면에서는
남안동 나들목에 내려 안동 방면 5번 국도로 안동에 도착하면 다리 건너지 말고 강변도로를 따라 진행하여 '영호대교'에서부터 '길안' 방면 35번 도로를 따라 계속 '길안'까지 이어진다. 길안에서는 서울 방면과 동일.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자연과 사람 그리고 여행’ http://blog.naver.com/eagle9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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