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개혁세력의 종언(終焉)
2007년 12월 22일
독재와 특권이 판치던 시대였습니다. 우리는 그 독재와 특권의 질서에 맞서 싸웠습니다. 민주화 정부 10년, 우리는 그 독재와 특권 질서의 해체에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비로소 민주주의 국가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공화당과 박정희 정권이 보릿고개를 넘겼다고 자랑한다면 우리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 선진 국가를 완성했습니다. 민주화 정부 10년을 통해 우리 사회는 특권과 반칙이 통하지 않는 정상적인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 질서를 좀먹던 정경유착의 시대도 끝이 났습니다. 국가 안보라는 이유로 국민의 기본권과 행복 추구권이 제한 받던 시대도 끝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얻게 되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저항할 수 있는 저항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권력기구들은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로지 국민의 여론에 따라 법이 정한 권한을 행사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동족상잔과 분단 국가라는 현실에서 대다수 국민의 상식이 되었던 대북 적개심과 대결의식이 이제는 화해와 협력의 정신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재벌이든 권력기구이든 정치권력이든 모두가 공정성과 투명성을 기초로 법에 따라, 민심에 따라 그 권한을 제한받게 되었습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로 민주주의를 혼란이라고 여겼던 대중의 상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적 원리가 국가 전체를 관통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경제적으로 성장했고 미래의 성장 동력을 축적했습니다.
철도노조가 파업을 선언해도 그것이 사회 혼란이 아니라 철도 종사자들의 있을 수 있는 집단행동으로 여기는 성숙한 민주 사회가 되었습니다. 분단과 반공의 시대에 도저히 허용될 수 없을 것 같던 사상의 자유도 활짝 꽃피우게 되었습니다. 자유로운 민주주의 국가가 완성됨으로써 우리는 세계를 향한 문화 대국으로서 한류라는 신조어를 만들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참여정부 5년은 재야와 야당이라는 이름으로 강물처럼 흘러온 우리 민주화 세력의 역사적 임무가 마감하는 순간입니다. 독재와 특권의 시대를 청산함으로써 우리의 역사적 임무가 완성된 것입니다.
5년 근 인삼을 캐낸 밭에선 더 이상 아무런 작물도 갈아먹을 수 없습니다. 객토를 하고 땅의 지기(地氣)를 다시 북돋지 않는 한, 그냥 그 밭에서 또 다른 작물을 심어 수확을 기대하는 농부는 없습니다. 우리가 겪는 현재의 혼란과 위기는 이런 인삼밭의 이치와 다르지 않습니다.
재야와 야당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국민에게 사랑을 받았고 그 덕분에 10년의 집권 기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뿌리내리고 있었던 재야와 야당이라는 이름의 역사적 에너지는 독재와 특권 질서를 해체시킨 지난 10년의 성과로 고갈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진보 개혁세력이라는 더 넓은 역사의 들판으로 근거지를 옮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보수진영이 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보수 개혁운동은 이런 역사의 흐름을 인식한 대응입니다. 그러나 최근 <한겨레>에 소개되었듯이 새로운 보수를 향한 그들의 개혁 운동은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무늬만 새것일 뿐 실제 내용은 반공과 냉전과 친미와 국가 주도형 리더십이라는 구태의연한 것들뿐입니다.
저는 이런 뉴라이트 운동과 한나라당의 구태의연함 때문에 2007 대선에서 우리에게도 승산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독재와 특권의 해체를 통한 민주주의 국가 수립에서 이제는 더 좋은 민주주의로, 평화와 복지라는 새로운 진보 개혁 세력의 과제를 국민앞에 효과적으로 제시한다면 우리에게도 승산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현실은 이런 희망과 승리의 비전을 찾기에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 빠져 버렸습니다. 우리의 일부는 재야란 이름의 전통적 지지기반에서 새로운 진보개혁세력으로 발을 옮기지 못했습니다. FTA에 반대하는 전통 개혁 세력에 의해 발목 잡혀 버렸습니다. 우리의 또 다른 일부는 호남이라는 전통적 지지 기반에서 새로운 진보 개혁세력의 미래로 발을 옮기 못했습니다. 대북송금특검 등을 이유로 호남의 민심이 이반되었다는 말로 과거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진보개혁세력은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전통적인 반미 투쟁, 반기업 투쟁, 반시장주의 투쟁의 구호만으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한나라당이 아무리 부패정당이고 이명박 후보가 아무리 부도덕한 지도자라고 선전해도 우리에게 표가 오지 않습니다. 재벌에 대한 투쟁, 독재권력의 부정과 부패에 대한 투쟁,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대한 반대 투쟁만으로 지지 받던 그런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진보개혁세력이 전통적 지지기반과 이념으로부터 자기 혁신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좋은 사례가 바로 영국 노동당입니다. 토니 블레어는 전통적 지지기반 - 노동조합에 의해 포위되어있던 영국의 노동당을 중산층과 서민의 새로운 진보 노선으로 당을 개혁했고 그래서 노동당 장기 집권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통적 지지기반이었던 호남과 재야 개혁 세력으로부터 새로운 진보 개혁 세력의 이념과 정책으로 우리의 정치 기반을 전환시키려 했습니다. 우리당 의원들은 이런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그동안 갖고 있던 본전만이라도 지켜보자는 태도를 일관되게 고수했습니다.
그러나 본전은 그렇게 해서 지켜지지 않습니다. 독재와 특권 질서를 해체한 그 순간, 전통적 지지 기반이었던 재야와 호남의 단결된 지지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명박씨나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역사인식, 국가 운영 비전을 갖고 21세기 대한민국의 미래가 그려질 수 없습니다. 1970년대식 국가 주도형 경제 개발 전략이라거나 대통령 1인의 개인기에 의존한 국가 운영 철학 그리고 좀 나아갔다고 해야 대처리즘을 흉내 낸 감세정책과 작은 정부론 정도로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을 풀어 낼 수 없습니다.
도덕성 담론, 반부패 담론, 반특권 담론만으로 살아왔던 우리의 전통적 지지 기반 이념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진보개혁세력의 ‘더좋은 민주주의, 더좋은 민주국가론’을 갖고 국민에게 표를 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출발은 민주정부 10년의 역사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을 선전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참여정부, 국민의 정부와 차별화된 새로운 비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은 지지했던 분들에게 우리가 이제까지 한 일은 다 잘못된 것이었고 실패했다고 말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계승하고 혁신하는 일입니다.
지금은 계승도 안 되고 혁신도 안 돼버린 상황입니다. 현재와 미래는 과거를 이기고 서야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딛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야 합니다. 그러면 차별화란 단어조차 필요 없이 다른 지도력, 다른 시대로 평가받을 것입니다.
저는 ‘새로운 진보개혁세력의 길’이라는 주제로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독재와 특권질서에 저항해 온 우리의 역사가 이제 또 다른 진보의 역사로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 지지기반의 회복은 민주화 정부 10년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줌으로써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면 안됩니다. 전통적 지지기반이 주머니 쌈짓돈처럼 우리를 언제나 기다려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보개혁세력, 민주화 세력, 평화민주세력... 뭐라고 표현하든 과거의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 국민 앞에 미래의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양극화의 문제가 모든 선진 제국의 정치적 이슈입니다. 세계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국가 발전 전략 역시 모든 선진 제국의 고민거리입니다. 바로 여기에 독재와 특권 시대를 청소한 민주세력의 자부심과 긍지로 더좋은 민주주의, 더좋은 진보개혁의 기치를 국민 앞에 세워야 합니다.
이미 민주정부 10년이 그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시장경제론에 입각한 국민의 정부가 있었습니다. 분배와 성장의 이분법적 대립이 아닌 동반성장론의 참여정부가 있습니다. 평화와 복지의 2030 미래 비전이 참여정부에 있습니다. 일극(一極) 중심의 대한민국에서 지역균형발전론의 참여정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장과 별개로 존재하는 민주주의에서 시장친화적인 민주주의여야 합니다. 자주와 사대주의가 대립되던 시대로부터 개혁과 개방의 세계적 질서에 걸맞은 자주노선이어야 합니다.
저는 제 작은 힘이나마 새로운 진보개혁세력의 기치로 민주화 세력 30년의 역사에 객토 작업을 하려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무늬만 뉴라이트인 저들과의 싸움에서 우리의 이념과 가치가 훨씬 더 세계사의 흐름에 부합하는 것이고 대한민국의 미래에 유익한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 때문에 이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시대정신이 있었기에 그 기치를 든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가치와 신념에 따른 행동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류가 될 때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비주류가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사투쟁은 우리가 주류이건 비주류이건 온전히 다 우리의 몫입니다.
새로운 진보개혁세력의 단결과 출발을 위해 저는 싸울 것입니다.
[출처 : 희망을 끔꾸게 하는 안희정 http://www.ahnhj.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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