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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람【人】

[스크랩] [펌]79935번 백두산호랑이님 글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 기록.-이명박 출생

by 禱憲 2008.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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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의 출생


이명박은 위 두 권의 책에서 자신의 출생에 대해 이렇게 밝혔습니다.

“우리 아버지 이름은 이충우, 3형제 중 막내였다. 할아버지의 땅뙈기는 두 형이 차지했고 아버지 혼자서 친구들과 함께 1935년에 총각으로 일본에 갔다. 자리 잡고 저축하여 한국에 나와 반야월 채씨 여인과 결혼을 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6남매를 낳았다. 아버지는 전통적인 유교풍을 이어받은 양반타입이었다. 남자 돌림자는 ‘상’자, 여자 돌림자는 ‘귀’자인데 나 혼자만 돌림자를 이탈했다. 명박이라 지은 것은 어머니 태몽꿈에 크고 밝은 달이 치마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

그러나 이는 순 거짓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일본 호적과 기타 자료에서 찾은 사실들을 보면 위 이명박이 밝힌 가족사는 맞는 게 하나도 없는 100% 거짓말입니다. 제가 찾아낸 진실은 이러합니다.

“아버지 이름은 원호적에 덕쇠(德釗)였고 33세에 일본에서 법원의 허락을 득해 충우로 바꾸었다. 덕쇠라는 이름은 떡쇠, 마당쇠, 돌쇠와 같은 계열의 이름으로 양반과는 거리가 멀다. 두 형들의 이름은 무특(무디기)과 경특(경디기)이다. 일본에는 이덕쇠 혼자 간 게 아니라 맏형 경특과 함께 오사카로 가서 이웃에서 살았으며 형제가 대가족을 이루면서 ‘스키야마’로 성을 바꾸어 씨족단위로 살았다.”

“어머니는 반야월 채씨가 아니라 인천 채씨다. 총각으로 일본에 갔다는 1935년에는 이미 3남매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귀선, 상은, 상득. 현 국회부의장인 이상득이 이덕쇠의 3째 아이였는데 1935년생이다. 덕쇠는 6남매를 모두 일본에서 낳은 게 아니라 4번째인 ‘귀애’는 포항에 건너와 1938년에 낳았다. 이 때 3남매는 4, 6, 9살이었고, 학령기에 접어들었다. 이 때 채씨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뒷바라지를 했으면 포항에 계속 눌러 있었다는 것이 된다. 만일 그랬다면 이명박(1941)과 바로 밑의 여동생인 이말분(1945)을 일본에서 낳은 여인은 다른 여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돌림자를 이탈한 것은 명박이만이 아니라 말분까지다. 이를 속이기 위해 이명박은 위 두 책에 ‘말분’이를 ‘귀분’으로 썼다. 이복형제설이 끼어들 수 있는 대목이 바로 이 대목이다. 자서전과 어머니를 읽으면 명박과 말분은 서자 취급을 받았다. 학교도 못 가게 하고, 돈만 벌라 했으며 종국에는 둘만 남겨두고 모두가 상경했다. 둘은 배고픔에 못 이겨 무작정 상경했다. 이런 서자 취급을 받았으면서도 ‘어머니’라는 책을 써서 띄우는 것은 가증스럽다는 생각이 들며 정략적으로 보인다.”

“채씨는 1964년 56세로 타계했다. 이 때 아버지 나이는 58세. 상은과 상득의 나이는 33세와 30세. 그런데 만 8년간 사망신고를 하지 않다가 채씨와 동거했던 맏사위가 1972년에 했다. 사망 장소는 동부이촌동 한강맨션. 지금의 타워팰리스 격이다.”

                                                             이명박의 호적세탁

호적도 세탁했습니다. 이명박은 1974년에 멀쩡한 호적을 세탁하여 아버지 이덕쇠의 이름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습니다. 이명박은 호적이 유실될 우려가 있어 1974년에 재작성 하였다고 변명하지만 영일군에서 보관하는 호적이 수만 명에 이를 터인데 유독 이명박의 호적만 유실될 우려가 있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또한 똑같이 영일군에서 보관하는 호적인데 구호적은 유실우려가 있고, 신호적은 유실우려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욱 어이가 없습니다. 또한 기록을 옮기려면 원래 것대로 옮겨야 합니다.

그런데 이명박 가에서 새로 만든 신호적에는 그의 부친이 33세까지 유지해온 ‘덕쇠’라는 이름이 흔적도 없이 지워졌습니다. 구호적에는 이덕쇠(德釗)가 이충우로 개명됐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있는데 신호적에는 이 개명사항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개명사항은 호적에 필수 기록사항입니다. 구호적에는 이덕쇠(德釗)가 7남매중 위의 4남매를 낳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신호적에는 7남매 모두를 이충우가 낳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호적세탁 자체도 대통령 할 사람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만, 호적세탁의 이유에 대해 호적이 유실될 우려가 있어서 재기록했다고 변명하는 것은 더욱더 한심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원호적(사진)



세탁된 호적(사진)


이명박의 자서전 내용은 호적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거짓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이명박 가는 왜 호적세탁을 하여 이덕쇠리는 이름을 없애 버렸을까요? 일본 총독부가 양반과 상놈의 계급을 없애면서 양반가에만 유지돼 오던 호적을 하류계급에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불리던 노비들의 이름이 공식문서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개똥이’는 ‘개동(介童)’이로, ‘이쁜이’는 이분(伊粉)이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명박 가문에게는 ‘덕쇠(德釗)’라는 이름이 싫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이명박의 자서전 내용은 호적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자서전을 거짓말로 써서야 되겠습니까?

                                                          이명박의 병역부정

‘신화는 없다’와 ‘어머니’에서 이명박은 자신의 병역사항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논산훈련소에 입소한 이후 나는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 어디 하나 정상적인 곳이 없는데다 결정적으로 기관지가 확장되어 있어 군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길로 나는 군대에서 쫓겨났다. … 치료를 받고 다시 오라는 말에 군생활을 하며 치료를 받고 싶다고 사정했지만 군의관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임마, 군대가 무슨 요양원인 줄 알아? … 매일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시장청소를 하고, 청소 후 나온 쓰레기를 이태원 시장에서 지금의 잠수교 근처까지 리어카로 날라야 했는데 … 그렇게 2년을 보내자 내 머릿속에는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쉬고 싶다. 단 하루라도 이 고달픈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 내가 찾은 탈출구는 군대였다. … 그런데 남들 다 가는 군대에서조차 퇴자를 맞은 것이다. … 자초지종을 들은 어머니는 나를 덥석 끌어안고 울먹이셨다, 미안하다. 명박아. … 어릴 때 술지게미만 먹여 키워서 그런가 보다. 다 내 탓이다. … 어미가 잘못했다. 그 몸으로 새벽마다 리어카를 끌었다니 ….”

위 인용된 글을 읽으면 이명박은 군대를 가고 싶어 했지만 술지게미만 먹고 거기에다 이태원에서 리어카를 끌었기 때문에 몸이 성한 곳 없이 만신창이가 됐으며, 군의관에게 군대 생활을 하면서 치료를 받게 해달라며 졸랐지만 수용되지 않았다는 애절한 사연으로 쓴 것입니다. 자신을 미화시키는 것은 물론 독자들의 동정심까지 이끌어 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황당한 거짓말입니다. 그에 대한 병무청 기록은 1961년 갑종, 1963년 입대 후 귀가(질병), 1964년 징병처분 미필, 1965년 병종(활동성 폐결핵 및 기관지 확장증).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이명박은 대학 1학년시절인 1961년에 이미 갑종 판정을 받았습니다. 갑종 판정이란 몸이 최고(A급)로 건강하여 군대에서 대환영한다는 뜻입니다. 이명박이 위 자서전과 ‘어머니’ 책에서 표현한 것은 1961년에 A급 판정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는 숨기고, 1964년과 65년 기록에 대해서도 함구했습니다. 오직 1963년도에 기관지확장증고도와 악성축농증 판정을 받아 귀가조치 받았다는 사항만 크게 연극적으로 부각시킨 것입니다.

위 두 개의 책을 읽은 독자들은 이명박을 아주 훌륭한 사람이고 그가 했던 고생에 대해 동정을 합니다. 가난과 병마를 극복하고 신화를 이룩한 그를 한 없이 존경합니다. 거짓입니다.

이명박은 1961년에 갑종 판정을 받았고, 1963년 왕성한 선거운동을 통해 학생회장이 되었고, 1964년에는 박정희 정권을 뒤엎기 위한 학생운동을 하다가 건강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도피생활을 했고, ‘내란선동죄’로 만3개월간 감옥살이를 했고, 1965년에 여름, 현대에 들어가 술의 천하장사가 됐고, 40도를 웃도는 열대지역에서 콘크리트 가루를 마시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여 11년 만에 사장으로 승진하는 신화를 이룩한 600만 달러의 슈퍼맨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술에 천하장사가 되었다는 것은 1965년 여름 정주영 회장이 강릉 경포대에서 208명의 신입사원과 함께 “저 달이 질 때까지 마시자”며 술 대작을 했는데 다 쓰러지고 이명박 혼자만 남아 술에 천하장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는 이명박 자서전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유독 1963년과 1965년 봄에 있었던 2차례의 병역관계 신체검사에서만 당시에는 ‘죽는 병’으로 알려진 기관지확장증 중에서도 최고의 위험수위라는 ‘고도’ 판정을 받았고, ‘악성축농증’ 판정을 받았고 또 다른 죽을병인 ‘폐결핵’ 판정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비리의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데도 그리고 병역비리를 저지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슈퍼맨의 기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는 어려서 술지게미만 먹고 자란데다가 리어카를 끌고 다니느라 몸이 걸레처럼 망가져 군대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고 자신을 미화했습니다.

이명박이 병역비리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데 대한 논리는 2개입니다.


1)'국가에서 실시한 신체검사에서 병역 면제 판정을 받은 것이라 아무런 하자가 없다.'

이명박의 이런 주장에 의하면 대한민국에 병역비리는 단 한 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병무청이라는 국가기관에서 실시한 신체검사에는 단 1%의 부정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명박이 내세우는 유일한 해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명박은 그의 자서전 제64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들은 있는 줄 없는 줄을 동원해 군에 안 가려고 하는 마당에, 나는 군에 가고 싶어도 병들어 가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병역비리를 저질렀는데 자기만 깨끗했다는 말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국가와 결탁하여 병역비리를 저지를 수 있다고 해놓고, 자기를 향한 의혹에 대해서는 “국가는 절대로 병역비리를 저지를 수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말이 통 안됩니다.
출처 : 못마루한우갈비
글쓴이 : 누렁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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