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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람【人】

사의재(四宜薺)

by 禱憲 2015.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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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思宜澹(사의담) : 생각은 맑게,

- 貌宜莊(사의장) : 용모는 단정하게,

- 言宜訒(언의인) : 말은 적게,

- 動宜重(동의중) : 행동은 무겁게,

 

다산 정약용이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형 정약전과 함께 전라도에 유배된 것은 1801년(신유년) 11월 22일이다. 나주의 율정에서 형 약전과 헤어진 뒤 이튿날 강진에 도착했으나 거처를 구하지 못했다. 집집마다 문을 닫고 유배온 사람이라 다산을 응대 해주지 않아서였다.

 

동문 밖 주막집 노파의 골방을 겨우 얻어 짐을 푼 다산은 그 주막집의 당호(堂號)를 사의재(四宜齋)라고 지었다.

즉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사의재는 강진에 유배 와서 처음 묵은 곳이다. 이곳 주막집(동문매반가)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은 다산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면서 붙임 이름으로 “네가지를 올바로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은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 이 네가지를 바로하도록 자신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언어)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스스로 주문하였다. 사의재는 창조와 희망의 공간이다. 사려깊은 주막 할머니의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얘기에 자신 스르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교재로 교육을 베풀고, 경세유표와 애절양 등을 이곳에서 집필하었다. 다산은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사의재 정약용이 1801년 11월 23일 강진에 유배와서 4년동안 기거했던 곳이다. 당시 오갈데 없는 선생의 딱한 사정을 알고 동문매반가의 할머니(주모)가 골방 하나를 내어준 것으로, 단산은 이곳에 ‘네가지(생각, 용모, 언어, 동작)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4의재라는 당호를 걸고 학문에 정진하여 「경세유표」「애절양」 등의 저서를 남겼다.

2015.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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