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와 저승길을 함께한 나무들
글·사진 / 박상진(경북대 임산공학과 교수)
옛 권력자들의 관재를 만드는 데 사용한 나무는 거리에 관계없이 영향력이 미치는 어디까지라도 운반하여 사용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바로 당시의 문화 교류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우리나라 고대국가 유적에서 발굴된 나무관재의 수종을 분석하고 이에 관련된 역사 문화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불로초를 찾으려 한 진시황의 시도를 들춰내지 않더라도 옛 권력자들이 불로장생을 꿈꾼 흔적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승에서 가능하지 않음을 현명한 권력자들은 일찌감치 알아버렸다. 내세에 가서나마 영원히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연스레 죽어서 자기가 들어갈 묘지 조성에 정성을 쏟았다. 거대한 고인돌의 유적에서 간절한 소망을 읽을 수 있고, 옹관묘와 아울러 목관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관재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관재를 만드는 데 적합한 나무는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의 어디까지라도 운반하여 사용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바로 당시의 문화 교류를 증명하는 근거로써 귀중한 자료이다. 우리나라 고대국가 유적에서 발굴된 나무관재의 수종을 분석하고 이에 관련된 역사 문화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백제 무령왕과 영광을 함께한 금송
1971년 7월 5일,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는 ‘잃어버린 왕국’ 백제 제25대 무령왕의 왕릉이 신비의 1,500년을 뒤로 한 채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수많은 유물 중에 왕과 왕비의 시신을 감쌌던 11조각의 널판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발굴 당시에는 시꺼먼 옻칠이 되었으며 어쩐지 으스스하기까지 한 이 나무토막들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 백제와 일본의 교류를 밝혀줄 귀중한 증거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은 발굴 20여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관재는 오래 되어 옻칠이 된 밑나무는 조금씩 썩기도 하였지만, 나무 세포의 기본 모양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발굴이 이루어지고 꼭 20년째인 1991년 무령왕의 관재 조각을 입수하는 행운을 안았다. 급히 프레파라트를 만들어 현미경 접안렌즈를 통하여 확대한 세포 모양을 들여다보던 나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일본인들이 자기네 나무라고 자랑해 마지않는 금송(金松)의 특징적인 세포배열이 잃어버린 기나긴 세월의 시공을 뛰어넘어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상벽공(windowlike pit)’이라는 구조를 가지면서 송진을 분비하는 작은 샘이 없는 것은 세계적으로 이 나무 하나뿐이다. 나는 어렵지 않게 금세 나무 종류를 알아낼 수 있었다.
금송(金松)은 낙우송과(科)의 금송속(屬)이라는 자손이 아주 귀한 집안의 외동아들이다. 세계의 다른 어떤 곳에도 없고 오직 일본열도의 남부 지방에만 자라는 교목이다. 판자를 만들어 놓으면 연한 황갈색을 띠어 고급스럽고 나이테가 살짝 들어 나는 은은함이 돋보인다. 특히 잘 썩지도 않으며 습기가 많은 장소에 쓰더라도 오래 버틸 수 있으므로 고급 나무관의 재료로는 최상품이다.
무령왕 관재가 일본 특산 금송으로 만들어진 명확한 사연은 아무도 모른다. 고대사의 여러 미스터리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다만 그는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고 다른 어떤 왕보다 일본과 관계가 깊은 인물이다. 지난 2001년의 해가 저무는 12월 23일 아키히도 일본 왕은 “간무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로 한국과 인연을 느낀다”고 하였다.
공교롭게도 지금의 공주박물관의 앞뜰에는 일제강점기에 심은 세 그루의 금송이 단아한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 그들의 선조 나무가 역사의 영겁으로 사라져 버린 백제 중흥의 기수 무령왕의 시신을 감싸고 있었다는 영광의 세월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엄하게 파헤쳐 전시되고 있는 대왕의 유물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일본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송
금송과 일본인들과의 인연은 무척 오래 되었다. 그들의 역사책 『일본서기』에서 소전명존(素箋鳴尊)이란 그들의 신은 수염을 뽑아 흩어지게 하니 삼나무로 변하고, 가슴의 털을 뽑아 날려보내니 편백나무가 되었다 한다. 또 볼기짝의 털은 금송이 되고 눈썹의 털은 녹나무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쓰임새도 정해 주었다. 삼나무와 녹나무로는 배를 만들고 편백나무로는 궁궐을 지어라 하였다. 금송은 시신을 감싸는 관재로 쓰라고 일렀다. 이처럼 먼 옛날부터 금송은 그들이 아끼는 나무 중의 하나이며 쓰임새를 관재로 정해준 역사가 무척 오랜 나무다.
멀리는 기원전 3세기경 성립된 것으로 알려진 미생(彌生)시대의 고분에서도 금송을 볼 수 있다. 세월이 지난 3~4세기경, 오늘날의 교토와 오사카를 비롯한 근기(近畿) 지방에 큰 옛 무덤들이 많아 이 시기를 고분시대라고 한다. 여기에는 소위 전방후원분이라는 일본식 무덤이 많은데, 발굴되는 관재는 대부분 금송이다. 특히 금송을 사용하는 무덤의 주인공은 다른 나무를 쓴 피장자보다 더 높은 신분, 정치집단의 우두머리로 보고 있다. 이처럼 일본에서의 금송은 건국신화에 나오는 신이 정해준 대로 기원전부터 고급관재로 널리 사용되었다.
금송은 무늬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향기가 특별한 것도 아니다. 습기에 강하고 잘 썩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니 관재로는 안성맞춤인 나무다. 다만 자라는 지역이 한정되어 있고 빨리 자라지도 않은 귀한 나무이니 높은 신분이 아니면 금송은 감히 관재로 쓸 엄두를 못 내었다. 관재 이외에도 금송은 평안(平安)시대 궁궐의 기둥, 나무다리, 나라(奈)시 아스카에서 발굴된 물시계 나무통을 비롯하여 여러 유물에서도 찾을 수 있다.
능산리 고분
1998년에 부여읍에서는 종합운동장 건설공사 중에 발견된 옛 무덤을 긴급 발굴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나온 여러 유물 중 목관은 모두 썩어버렸으나, 널판의 서로 이음에 쓴 여러 개의 쇠못에 주목하였다. 이것은 녹슨 산화철과 목질이 혼합된 작은 쇳덩이가 조금씩 붙어 있는 볼품없는 유물이다. 하지만 1,400년 세월을 건너뛰어 백제인의 삶의 일단을 짐작해볼 수 있는 과학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불과 10여 개의 세포가 고작이고, 머리카락 굵기의 크기가 괜찮은 표본을 잡고 시름하였다. 이럴 때 전자현미경이라는 20세기 발명품은 타임머신을 타고 비운의 고대국가 백제로 금세 달려갈 수 있게 해준다. 모니터에 비춰진 세포 모양은 뜻밖에도 비자나무의 몸체임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다. 아니! 비자나무가 왜 여기서 나오는가? 이 나무는 지금도 부여 일대에는 추워서 자랄 수 없으며 무덤이 만들어지던 백제 후기 사비시대(538~660)에도 자라지 않았다고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나무는 남해안에서 제주도, 일본에 걸쳐 자라는 바늘잎늘푸른나무다. 그렇다면 관재로 쓰인 비자나무는 멀리서 가져온 것이 틀림없다. 남해안이나 그 보다 더 남쪽 지방에서 가져온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아울러 무령왕의 관재와 이웃한 능산리 왕릉의 관재가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것에 비추어 본다면, 이 비자나무를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가능성도 전혀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는 비록 녹슨 쇠못 하나지만 사비시대에 백제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쳤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능산리 왕릉
논산에서 부여로 들어가는 길에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7기의 옛무덤을 중심으로 사적 제14호로 지정된 곳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여기서 나온 관재는 일본 교토대학 교수 미중문언(尾中文彦)이 분석하였다. 그는 1946년 발굴자 매원(梅原)씨에게서 5기의 무덤에서 옻칠된 목관조각을 얻어 현미경 검사를 하였다고 한다. 사용된 나무는 모두 금송이었다. 이곳 이 외에도 그가 장소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백제 후기 목관 10여건의 분석결과도 마찬가지로 금송이었다고 한다.
능산리 왕릉은 백제 무왕이 538년 공주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660년 멸망할 때까지 122년사이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이곳의 관재가 일본 특산인 금송이라는 것은 공주에 있던 웅진시대의 마지막 임금 무령왕에 이어 사비시대에도 관재를 가져다 쓸 만큼 계속 일본과 긴밀한 외교관계가 지속된 것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낙랑 고분
평양시 낙랑구역에 있는 낙랑고분군은 넓은 지역에 걸쳐 1,300여 개의 무덤이 흩어져 있다고 알려져 왔다. 일제강점기 때 처음 발굴이 시작되었고, 지금도 북한이 발굴을 진행하고 있으며 최근 그들의 발표에 따르면 무덤 숫자도 2,60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무덤은 덧널무덤, 벽돌무덤 및 혼합형이 있으며, 일부 무덤에서는 목곽이나 목관이 출토되고 있다. 사용된 나무의 종류로는 1936년 미중문언(尾中文彦)과 1993년 필자가 조사한 내용이 있다. 그가 분석한 낙랑고분 정박리(貞拍里) 4호 관재는 넓은잎삼나무, 석암리(石巖里) 257호 관재는 주목임을 밝히고, 목곽(木槨)재는 둘다 졸참나무 종류라고 하였다.
넓은잎삼나무는 우리나라에는 자라지 않고 중국 양쯔강 남부에서 대만에 걸쳐 있는 나무다. 바늘잎늘푸른나무로 키 3~40m, 지름 두세 아름이 넘게 자란다. 바깥 모양과 재질이 삼나무와 비슷하나 잎이 더 넓으므로 광엽삼(廣葉杉)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 나무는 잘 썩지 않고 재질이 비교적 단단하여 관재를 비롯하여 돛배의 돛대나무로 쓰이기도 하였다. 관재로 사용한 예는 미이라가 출토되어 유명해진 호남성 장사(長沙)의 마왕퇴(馬王堆) 무덤이다. 목관은 가래나무이고 목곽은 이 나무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정박리 4호분의 관재는 넓은잎삼나무가 자라는 양쯔강 남부에서 수입하여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주목은 재질이 붉은색을 띠어 벽사의 의미가 있고 잘 썩지 않는 특징 때문에 관재로 널리 쓰이는 나무다. 필자가 조사한 결과도 목관은 주목이었으며, 목곽은 역시 졸참나무 종류였다. 『성경통지(盛京通志)』란 중국의 옛 책에는 “주목은 향기가 있고 목관으로써 가치가 높아 아주 귀하게 쓰인다”고 하였다. 이처럼 주목은 예부터 중국에서도 관재로 쓰인 나무였다. 주목은 우리나라에 널리 자라는 주목(Taxus cuspidata)과 중국 중·남부에 자라는 중국주목(Taxus chinensis)이 있다. 관재로 사용된 주목이 우리 주목인지 중국주목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따라서 낙랑고분의 관재가 중국주목으로 넓은잎삼나무를 수입할 때 함께 수입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곳 이 외에도 만주 길림성 집안현 환문총(環紋塚) 및 경주 금관총의 관재가 주목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중국에서 주목을 꼭 가져와야 할 이유는 없다.
어쨌든 낙랑고분은 관재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일부는 멀리 중국 남부에서 나무를 직접 가져다 만들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주목해보아야 할 부분이다. 관을 둘러싸는 목곽재는 평양 주변에도 흔히 자라고 있던 참나무 종류를 이용하였다.
금관총 및 98호 고분
1921년 9월, 지금의 경주시 한가운데 있는 봉화대 밑에서 집수리를 하다가 옛 무덤이 하나 우연히 발견되었다. 다음해 정식 발굴된 옛 무덤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금관이 발견되면서 금관총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길이 8자 3치, 너비 3자 3치 크기의 옻칠된 목관이 있었으며 주위에는 목곽으로 둘러쌌다. 목관은 강기정충(江崎政忠)씨에 의하여 주목으로 밝혀졌고, 목곽은 미중문언씨가 녹나무로 분석하였다.
또 필자가 최근 1975년에 발굴된 경주 98호 고분의 관재를 조사해본 결과 녹나무가 검출되었다. 여기서 목곽과 목관의 녹나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녹나무는 예로부터 향장목(香樟) 또는 예장(豫樟)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나무다. 주로 배를 만드는 나무로 쓰였으나 일부에서는 관재로도 이용되었다. 중국 후한시대 유학자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는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는 것을 경계하여 “귀족이 강남(양쯔강 남부)에서 나오는 녹나무를 좋아하기 때문에 아랫사람들도 이것을 배워서 그 풍습이 동쪽으로는 낙랑, 서쪽으로는 돈황(敦煌)까지 미친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최근 사천성 성도(成都)시에서는 녹나무로 만들어진 춘추전국시대의 거대한 배 모양의 목관이 대량으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도 정강현에 있는 적문상고분(赤門上古墳)을 위시하여 몇 군데의 관재는 녹나무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녹나무를 사용한 것은 98호분과 금관총이 처음이다. 녹나무가 주로 자라는 지역은 우리나라의 제주도, 일본 남부, 중국의 양쯔강 남부를 비롯한 아열대 지방이다. 식물학적인 분포한계선을 최대한 북쪽으로 보더라도 남해안의 다도해 섬지방을 벗어나지 않는다. 또 분포한계선에 자라는 나무는 자람이 좋지 못하여 관재와 같은 고급쓰임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고려사』에 보면 충렬왕 9년(1283) 원나라에서 백라개(伯刺介)를 파견하여 “탐라도에서 나는 향장목(香樟木)을 요구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녹나무는 통일신라 이후 신라영역이 된 남해안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은 매우 낮고, 위 세 지역 중 어느 곳에서 수입한 나무로밖에 볼 수 없다.
기타 목관재
사적 제327호 의창 다호리 고분군의 1호분에서 나온 대형목관이 있다. 상수리나무를 구유 모양으로 가운데를 파내고 시신을 넣은 형태이다. 이 나무는 비중이 0.8 정도의 극히 단단한 나무로 발달된 철기기술로 강한 칼날을 만들 수 있어야 구유 모양으로 파기가 가능하다.
전라남도 화순군 대곡리 영산강 구릉 청동기시대의 무덤 유적에서 나온 관재 조각은 굴피나무였다. 이 나무는 지름 30~40cm 정도 자라는 작은 나무이고 경상도와 전라도 이남에 자란다. 별로 쓰임이 없어서 잘 알려져 있지도 않은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나무다. 그러나 이 관재를 비롯하여 전남 완도 장좌리 사적 제308호 청해진 유적지 나무울타리의 일부 및 완도선에서도 굴피나무가 들어 있다. 옛날에는 보다 훨씬 큰 나무가 많았던 것으로 짐작되며 한때 이렇게 우리 선조들의 곁에서 잘 나가던 이 나무가 왜 쇠락의 길을 걷게 된지는 미스터리다.
경주 황남동의 천마총, 1988~1999년에 걸쳐 발굴된 경산시 임당동 고분군, 동래 복천동 고분 관재는 느티나무로 만들어졌다. 느티나무는 나무결이 곱고 황갈색의 색깔에 약간 윤이 나며 썩거나 벌레가 먹는 일이 적은데다 다듬기도 좋다. 건조를 할 때 갈라지거나 비틀림이 적고 마찰이나 충격에 강하며 단단하기까지 하다. 한 마디로 나무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장점을 다 가지고 있는 ‘나무의 황제’다. 이렇게 죽어서도 임금님의 시신을 감싸고 영생의 길을 함께한 영광의 나무였던 셈이다.
한편 1990년대 들어서 발굴된 경산 임당동 59호 및 69호 고분의 관재는 밤나무였다. 목재는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며,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서 사당의 위패, 제상(祭床) 등 조상을 숭배하는 기구를 만드는 재료로도 널리 쓰였다. 일본에서는 관재로 쓰인 예가 있다. 기타 임당 고분에서 산뽕나무도 관재로 쓰인 바 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천여년 동안은 목관에 대한 정보를 필자는 갖고 있지 않다. 이 시기는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이 성행하었고 특별히 발굴된 사례도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관재는 거의 소나무로 통일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임금과 왕실에 쓰는 관재는 재질이 좋은 소나무, 즉 황장목(黃腸木)을 사용하였다. 소나무는 재질특성이나 지금의 광범위한 분포상태로 보아서는 고대에도 비교적 널리 쓰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으나 삼국시대 이전의 관재에서는 출토된 예는 거의 없다. 이유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소나무보다 관재로 쓰기에 더 좋은 주목, 느티나무, 참나무 등을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비자나무, 금송, 녹나무처럼 멀리서 가져오거나 심지어 외제품 수입까지 가능하였으므로 소나무를 쓰지 않은 것이다. 또 당시에는 숲이 우거져 햇빛을 좋아하는 소나무가 많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출처 : 다음카페 곧은터 사람들 http://cafe.daum.net/myrefarm/TNXX/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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