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학【美學】
<한옥미학 23> 비움의 미학
by 禱憲
2010. 8. 1.
비움의 조건, ‘한옥의 투명한 방’
한옥의 공간을 얘기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할 특징이 ‘비움’이다. 비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단순히 그릇을 비우는 것처럼 가구 같은 방 안의 살림살이를 뺀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식이라면 비움이란 살림살이 없이 빈 방에서 산다는 뜻이 되는데,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물론 하층민의 실내생활을 비교했을 때 서양의 오두막보다 우리의 초가가 더 간단하고 소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배계층으로 가면 큰 차이가 없다고 보면 된다. 성철 스님이 기거하던 방도 아닐진대, 양반들의 실내 살림살이는 나름대로 방을 제법 채웠다.
단순히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고 비움이 아니다. 물건을 채울지 말지 그 이상의 개념이다. 스케일에 따라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작은 스케일에서는 방의 투명한 골격과 관계가 깊다. 큰 스케일에서는 이런 방을 앞뒤로 마당이 감싸면서 그 마당을 텅 비워두어야 한다. 한옥에서 비움의 미학은 이 두 상태의 합작품이다. 빈 마당을 사이에 두고 투명한 방이 마주보거나 혹은 투명한 방을 앞뒤에서 빈 마당이 감싸는 경우 등이다.
한옥의 방이 투명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순수한 물리적 의미로 보면 한옥의 방은 투명하지 않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보면 투명하다. 투명의 기준에는 온통 유리만으로 만든 어항 같은 시각적 투명이 있다. 시각적으로 투명한 것이 반드시 심리적으로도 투명한 것은 아니다. 어항처럼 유리로 된 방속에 들어 있으면 바깥 경치는 한눈에 잘 들어오지만 이상하게 바깥으로 나가기는 싫어지는 묘한 양면성이 있다. 노골적 투명에 따른 역작용이다. 내가 너무 심하게 노출되어 있고 반대로 대상을 너무 투명하게 다 볼 수 있으면 오히려 한 발 물러나려는 방어본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돌이나 콘크리트처럼 불투명한 고형 재료로 지은 집은 당연히 투명하지 않게 된다. | |
창덕궁 연경당 투명한 방과 빈 마당이 어울려 비움의 미학을 완성한다. 비움의 미학은 채와 채 사이에 다양한 관계 맺기를 유발한다. |
한옥의 방은 이 중간 상태이다. 나무와 흙이라는 자연재료로 벽을 세워서 방의 윤곽이 어딘가 모르게 가볍게 느껴지며, 창문은 창호지라는 반투명 재료로 막아서 빛을 잘 들이면서 바깥에 대한 심리적 호기심을 높여준다. 간접 반사에 의한 방 안의 조도도 중요한 요소이다. 천장이 낮고 그에 비해 창 면적이 넓은 편이며 불규칙적으로 나 있기 때문에 방 안에는 다양한 간접 반사광이 교차하게 된다. 벽 재료가 무거운 돌이 아니라 가벼운 흙과 나무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가볍고 무르기 때문에 반사되는 빛이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우며 은은하다. 창문을 다 닫으면 바깥 장면은 하나도 볼 수 없지만 방 안은 신기하게도 투명한 상자처럼 느껴진다. 유리상자의 투명과는 다른 한옥 특유의 투명이다. 물리적 투명도는 높지 않으나 감각적, 감성적으로 투명하게 느끼는 묘한 공간이다.
비움의 조건, ‘빈 마당’
큰 스케일에서는 마당이 비움의 주인이다. 일단 마당을 말 그대로 비워야 하는데 한옥의 마당이 정말 이렇다. 한옥의 마당은 텅 비어 있다. 잘해야 돌확이나 몇 점 놓는 정도이며 안채 뒷마당에 장독을 두는 정도가 마당을 꽉 채우는 경우이다. 큰 잔치가 벌어지면 안채 안마당이 작업장이 되면서 여자 식구들과 잡동사니로 제법 차겠지만 나머지 경우는 비워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부러 조경을 하지 않은 이상 마당을 채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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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 도화리 고가 ‘이쪽 마당-광-건너편 마당-건너편 광-그 너머 마당’의 다섯 겹 공간은 빈 마당의 작품이다. |
수애당 솟을대문과 중문이 겹치는 이중 틀은 동선여정에 특별 한 경험을 주는데, 이는 중간에 빈 마당이 있기에 가능하다. |
마당을 비운 것은 방을 비우는 것과 달리 한옥에서 ‘비움의 미학’의 핵심을 이룬다. 일단 이 자체가 한국화의 ‘여백의 미학’처럼 하나의 독립적 미학적 가치를 갖는다. 마당을 무엇인가로 가득 채우는 경우보다 반드시 나으란 법은 없지만 못할 것도 없다. 여백이 미학적일 수 있는 것은 일반론적으로 말하면 쉼의 가치 때문이다.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는 장면을 볼 때 가져야 하는 심리적 부담과 시각적 피로 같은 것에서 해방시켜 주는 쉼의 미학이다.
이것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이 노장사상의 가르침인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이다. 도자기의 비유라고도 하는데, 도자기의 쓸모 있음은 딱딱한 껍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따라서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기 쉬운 가운데의 빈 공간에 있다는 가르침이다. 딱딱한 껍질은 오히려 다른 존재가 들어오는 것을 막고 방해하기 때문에 진정한 쓸모 있음을 못 만들어낸다. 내 마음에 물욕이 가득 차 있으면 아무것도 들이지 못하고 혼자서 그 욕심을 부여매고 끙끙대다가 망가져 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런 일반론은 한옥의 마당에 대한 건축적 해석과 대체로 일치한다. 다소 심심하고 무성의해보이며 심지어 삭막하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마당을 비워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공간적으로 어떤 이득이 있길래 마당을 비운 것이며, 마당을 비웠더니 공간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우선 마당에서 복사열을 이용한 대기 순환에 유리하다. 마당을 가득 채우면 여름 남동풍의 바람 길을 막기 때문이다. 빈 마당은 지붕 처마 선이 내려놓는 그림자를 조형 요소로 활용하기에 더 없이 유용하다. 계절과 하루 중의 시간대, 그리고 날씨 등에 따라 수시로 길어졌다 짧아지며 진해졌다 흐려지는 항변의 조형요소를 집에 끌어들여 즐길 수 있게 된다. 빈 마당은 햇빛을 집에 들여 함께 하는 중요한 통로이다. 앞의 바람과 합하면 햇빛과 바람이라는 대표적인 자연요소와 함께 살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 |
비움의 쓸모 있음
마당을 비워서 얻는 쓸모 있음의 최고 경지는 방과 방 사이의 관계를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마당이 방을 앞뒤로 감싸는 구성 및 그 속에서 채의 꺾임이 많다는 점이 그 비밀이다. 투명한 방과 빈 마당은 따로 놀지 않고 함께 작동한다. 방 자체가 투명하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본격적인 비움과 거리가 있다. 마당이 더해져야 한다. 그것도 빈 마당이 앞뒤에서 겹으로 싸야 한다. 방도 마찬가지이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앞뒤에서 호위해야 한다. 종합하면 방과 빈 마당이 각자 두 겹 이상 서로를 교대로 에워싸야 한다. 실제 많은 한옥이 이런 구성을 하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순수 공간의 관점에서 보자. 이쪽 방에서 보면 밖에 마당이 있고 그 건너편에 다시 다른 채와 방이 있게 된다. 건너편 채와 방 너머에 다시 마당이 한 겹 더 있으며 그 바깥쪽으로 채와 방이 또 나오기도 한다. 한옥 특유의 공간적 특징이다. 마당을 비웠기 때문에 이런 겹 구성의 공간적 특징이 온전히 드러나면서 그 효과가 살아날 수 있다. 공간 토폴로지의 관점에서 보면 나를 중심으로 다른 채와 방들 사이에 다양하고 복합적인 관계가 만들어진다, 건축 공간론에서는 이런 구조를 최고의 상태로 친다.
이런 물리적 공간구조는 사람들 사이의 화학적 관계를 유발시키는 다음 단계로 작동한다. 이런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다른 식구들과 다양한 관계 맺기를 만들어 활용하고 즐길 수 있다. 마당의 적당한 거리에 의해 건너편 방에 대해 소통과 교류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대가족제도에 꼭 필요한 공간구조이다. 이때 앞에 얘기한 한옥 방 특유의 투명성이 중요한 활약을 하게 된다. 시각적으로 적절히 닫으면서 바깥에 대해 끊임없는 호기심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마당이 만들어주는 소통과 교류의 가능성을 강화해준다. 이상의 여러 특징과 이로움은 모두 마당을 비웠기에 가능한 일이다. 마당을 다른 것으로 채우게 되면 사람의 관심이 여기에 쏠려 다른 채나 방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소홀해지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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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 안채 마당을 비웠기에 문밖과 안쪽 채가 공간 관계를 형성한다. | |
눈앞의 시각요소에 관심이 쏠리게 되기 때문이다. 한옥의 빈 마당은 이것을 경계했다. 그 결과 시각 요소를 철저히 배제한 대신 식구들 사이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대가족제도를 원활하게 유지하는 데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다. 비웠더니 쓸모 있게 된 것이다. | |
- 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 동서양을 막론한 건축역사와 이론을 주 전공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명비평도 함께 한다. 현재까지 3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공부로 익힌 건축이론을 설계에 응용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jyimis@empas.com
[출처]네이버캐스트 :: 오늘의 집 > 한옥미학 2010.06.28.
http://navercast.naver.com/home/koreanstyle/3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