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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학【美學】

<한옥미학 20> 한옥의 '바람 길'

by 禱憲 2010.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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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길과 통

통(通)의 비밀을 집에 적용

창문이 안 열리는 초고층 주상복합의 불편함이 화제이다. 자연환기가 봉쇄된 것인데, 사람에 비유하자면 일 년 내내 두꺼운 옷을 잔뜩 끼어 입고 여름에는 그 속에 에어컨을 집어넣은 격이다. 옷을 벗으면 될 것을 말이다. 여름에는 얇은 반팔 옷 하나만 입고 겨울에는 두꺼운 옷 여러 개를 입는 것이 상식이고 이치이다. 집도 이래야 된다. 여름에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사방에서 바람을 시원하게 받으면서 열을 식힐 수 있어야 하고. 겨울에는 햇볕을 알뜰살뜰 모으고 사면을 잘 걸어 잠가 안으로 열을 지켜야 한다.

 

바람을 알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국민상식으로 시작해야 한다. 한반도는 여름에는 남동풍이, 겨울에는 북서풍이 분다. 한옥은 이런 작은 상식 하나만 가지고 여러 가지 과학적 방식을 창출해 집안 가득 바람을 들인다. 한옥에서는 바람이 절실히 필요한 여름에 이 방위에 맞춰 길을 냈다. 바람이 드나드는 ‘바람 길’이다. 통(通)의 비밀을 집에 적용한 것이다. 바람 길은 시원하고 통 크게 나 있다. 인색함도 머뭇거림도 없다. 집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일직선으로 뚫려 있다. 바람 보고 돌아가라거나, 쉬어가라거나, 꺾어가라거나 하는 실례를 범하는 법이 없다.


바람 길은 하나가 아니다. 이쪽에도 바람 길, 저쪽에도 바람 길이다. x축과 y축의 십자 구도를 기본으로 여러 개의 사선 축이 교차한다. 원융무애와 중첩이라는 한옥 공간의 비밀이 만들어내는 효과이다. 공간과 환경조절기능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한몸으로 작동한다. 여름에 바람의 고마움을 실컷 활용하기 위해 집을 짓다 보니 공간이 원융무애해지고 중첩되게 나타났다. 거꾸로 불교의 '공(空)'과 노장의 '무위'의 가르침이 한 곳에서 만나는 개념이 원융무애이고 이것을 건축공간으로 구현한 것이 중첩인데, 이렇게 만들다보니 반은 우연으로 또 나머지 반은 필연으로 바람 길이 시원하게 이곳 저곳에 뚫렸다.

 

풍경작용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바람 길을 내다보니 집안 이곳 저곳에 당연히 구멍이 숭숭 뚫릴 것이고, 이것을 통해 다양한 풍경작용이 우연히 일어난 것일 수 있다. 또한 그 반대일 수도 있다. 풍경작용을 즐기려는 치밀한 전략에 따라 창과 문을 내다보니 그것이 자연스럽게 바람 길도 겸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옥의 특징 가운데 최고수는 이렇게 서로 달라 보이는 여러 요소와 특징들이 영향과 관계를 주고받으면서 복합적이고 종합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바람 길을 중심으로 공간과 풍경작용의 세 가지 사항 사이에 벌어지는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건축 작용이 벌어진다.

 

 

창덕궁 연경당 방이 네 개나 겹쳐도 창은 어긋나지 않고, 
바람 길은 어김없이 난다.

관가정 사랑채 창은 사선으로도 어긋나거나 막히는 법이
없다. 바람 길은 사선으로도 난다.

 

 

막힘없는 바람 길과 시원한 대청, 바람을 들이는 창과 문의 활약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창과 문이다. 한옥의 창문은 아무렇게나 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비밀은 간단하다. 막히지 않게 뚫어주는 ‘통’이 답이다. 한옥에서는 중간에 방들이 복잡하게 교차하지만 창끼리의 위치는 자세히 보면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조금씩 어긋날 수는 있지만 꼬챙이로 끼우면 산적처럼 한 줄로 늘어선다. 창의 위치가 일직선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x축, y축, 사선 축 어느 곳이든 그렇다. 한옥의 창이 햇볕에 대해서 참 많은 고민을 한 끝에 그 온기와 명암 농도를 최적으로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게 뚫린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고민을 바람에 대해서도 했다. 바람 길을 가로막지 않고 고맙게 씽씽 통과할 수 있게끔 뚫렸다. 한옥에서 창은 햇빛과 바람과 어울리는 통로이다. 대개, 바람이 다니는 길에는 햇빛도 잘 들게 마련이다. 바람과 햇빛을 함께 고민해서 둘이 어울려 작동하게 했으니 여름과 겨울이라는 양 극단의 혹독한 기후조건에 대해서 모두 능통하게 대처했음이다.

 

한옥의 환경조절기능, 즉 친환경성은 분명 여름에 제일 뛰어나다. 아무리 햇볕을 잘 받아들여 보존하고 크나큰 인내심을 발휘한다고 해도 한옥의 겨울을 난방 없이 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름에는 에어컨 없이 충분히 보낼 수 있다. 한옥의 장점은 여러 가지인데, 한여름에 대청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일은 분명 으뜸을 다툴 만하다. 추가로 필요한 것이라곤, 다리 사이에 낄 죽부인과 속옷 바람으로 누워 뒹굴 거릴 능청스러움, 그리고 찬 수박 두 쪽 정도이다.

 

 

마당을 비워 바람을 돕다 

대청에는 한여름에도 신기한 바람이 솔솔 분다. 우연이 아니다. 초보적 과학상식을 집에 잘 활용한 결과이다. 비밀은 마당을 비운 데 있다.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은 노장사상의 핵심적 가르침인데 비움의 미학도 그 중 하나이다. 한옥에서는 마당을 비우는 데 이 지혜를 빌렸다. 마당을 가득 채우는 것은 인공적이고 의도적으로 쓸모 있음을 추구하는 것에, 반대로 마당을 비우는 것은 쓸모 없음의 지혜를 좇는 것에 각각 해당된다.

 

 

관가정 안채 뒷산 송림의 시원한 여름바람을 대청으로 받아 마당으로 넘겨 중문으로 나가게 하는 대기 순환의 교과서이다.

 

 

한옥에서 마당을 비웠더니 의외의 쓸모있음이 발생하게 된 것인데, 채와 채 사이에서 중첩되는 공간이 만들어진 것과 바람 길이 난 것 두 가지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이 둘은 미학주제로는 별도의 것이지만 실제 한옥에서는 함께 작동한다. 마당을 비운 것과 바람 길 사이에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 한옥에서는 왜 마당을 그렇게 심심하게, 심지어 삭막하다고 느낄 정도로 철저하게 비워뒀을까. 답은 여름을 시원하게 나기 위해서이다. 여름에 햇볕을 받아 달궈진 공기는 더워져서 위로 올라간다.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대청 뒤쪽에서 바람이 불어오게 되는데, 이것이 대청에서 느끼는 여름의 시원한 남동풍이다. 마당을 비운 것은 복사열을 이용한 대기의 순환작용, 즉 ‘통’의 작용이 잘 일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청의 향과 건축구조도 이것을 돕는 쪽으로 만들어졌다. 한옥의 각 채는 ‘ㄴ’자형, ‘ㄷ’자형, ‘ㅁ’자형 등 꺾임이 많으며 심지어 ‘ㄹ’자형 까지도 있다. 이 때문에 방의 향은 의외로 남향이 아닌 경우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대청만은 반드시 남향을 지켰다. 여름의 바람 향인 남동풍에 맞추기 위해서이다. 대청의 뒷벽에는 큰 문 두 짝을 냈고 앞은 기둥을 세워 완전히 개방했는데 이것 역시 바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한 것이다. 뒷문은 창호지를 쓰지 않은 나무문이라서 꽁꽁 닫으면 뒷벽은 완전히 막히게 되는데 이것은 겨울의 북서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문의 크기가 벽 전체를 거의 다 차지할 정도로 크기 때문에 활짝 열면 벽을 거의 다 털어낸 것이 된다. 여름에 뒷산 송림에서 부는 시원한 나무바람을 잘 통과하게 해준다.

 

대청 앞의 기둥 구조는 겨울과 여름 모두에 유리하다. 겨울에는 햇볕이 막힘없이 잘 들게 해주고 여름에는 바람이 역시 막힘없이 잘 흐르게 해준다. 중문의 위치도 같은 이유로 정해진다. 대개 대청 전면에 맞춰 중심축을 공유한다. ‘대청 뒷문-대청 앞 기둥-중문’의 큰 구멍 셋이 일직선 축 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풍경작용에서는 중첩과 ‘액자 속 액자’를 만들어내는, 한옥에서 제일 아름다운 지점 가운데 하나가 되는데, 환경조절작용의 관점에서 보면 여름에 시원한 바람 길을 낸 것이 된다.

 

풍수지리의 ABC인 남향과 배산임수도 여름의 환경조절기능과 관계가 깊다. 남향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겨울에 햇볕을 가장 잘 받게 해주는 방위이지만, 적어도 여름에 남동풍이 부는 한반도에서는 바람을 집안 깊숙이 들게 하는 방위이기도 하다. 배산임수도 마찬가지이다.  


 

아산맹씨 행단 이렇게 큰 문과 저렇게 작은 문도 구멍의 중심을 한 줄에 맞췄다. 문 셋이 꼬챙이에 꿰듯 바람 길을 만든다.

  

거시적으로 보면 배산임수의 자리는 혈 자리와 일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산세와 강세를 이용해서 나쁜 기운을 막아주고 생명의 기운을 살리려는 목적을 갖는다. 미시적으로 보면, ‘배산’은 시원한 나무바람을 뿜어대는 자연 에어컨인 것이고, ‘임수’는 강바람에 올라 타 대기의 순환작용을 가일층 돕는 자연 모터인 것이다.

  

 

 

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동서양을 막론한 건축역사와 이론을 주 전공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명비평도 함께 한다. 현재까지 3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공부로 익힌 건축이론을 설계에 응용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jyimis@empas.com
[출처]네이버캐스트 :: 오늘의 집 > 한옥미학   2010.06.17.   http://navercast.naver.com/home/koreanstyle/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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