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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학【美學】

<한옥미학 26> '항변'과 '다양성'

by 禱憲 2010.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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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변’과 ‘다양성’

항시 변하는 집

전통적인 동양사상에서는 만물의 본질이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다. 우리에게도 낯익은 ‘무상(無常)’이라는 개념이다. ‘상’이란 상수, 즉 고정된 상태란 뜻이니 무상이란 곧 고정된 것은 없다는 뜻이다. 동양권 중에서도 한민족이 유독 무상이라는 개념을 좋아했고 만물의 진리로 받아들여 문화와 생활 곳곳에 반영하며 살아왔다. 만물에는 한 가지 지고지선의 상태가 있다고 보고 이데아라고 이름까지 붙이며 그것을 찾아 헤맨 서양의 절대주의 세계관과 구별되는 대목이다.

 

무상은 자연이치와 세상만물에 융통성 있게 대응하려던 효율적 전략이지만 자칫 허무로 흐를 소지가 큰 것도 사실이다. 이를 경계하기 위해 무상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으로 형식화해서 현실세계로 내보였는데 한옥이 그것이다. 한옥의 여러 이로움을 통해 무상이란 것이 부정적이거나 허무한 것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으로 구체적 이로움을 준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상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집에 실어낼 수 있었을까. 무상은 추상적 개념이기 때문에 집 같은 물리체로 직접 표현하는 것은 힘들다. 조금 돌아가면 되는데 다양성이 그 해답이다. 집을 다양하게 만들어 그 다양성을 수시로 구현하다 보면 집은 항시 변하는 상태에 있게 된다. 항시 변한다는 것은 항변인데, 항변은 무상과 같지는 않지만 유사한 의미를 가질 수는 있다. 사상이나 개념이 건물 같은 물리적 구조체에 반영되는 과정에는 일정한 응용과 변형이 따르게 되는데, 항변과 무상의 동의어적 관계도 이 범위 내에 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김동수 고택 사랑채 ‘원통’한 공간은 곧 ‘항변’하는 공간이다. 구멍이 숭숭 뚫려서 동선이 원활하고 그 구멍을 막고 닫는 데 따라 집은 수시로 변한다.

 

  

중요한 것은 한옥 공간은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정말로 다양하게 변한다는 사실이다. 한옥의 공간적 특징인 비움, 불이, 중첩, 관입, 원통 등이 종합적이고 유기적으로 서로 얽히며 작동한 결과이다. 이것을 공간의 구조형식을 이루는 건축 요소로 나누어 몇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일차적으로 창이 변화무쌍하다. 창 스스로가 크기, 위치, 모양, 방향, 열리는 방식 등이 다양하다. 행랑채를 빼고 사랑채와 안채만을 기준으로 할 때 한옥 한 채에는 보통 30~50개 정도의 창이 나는데 같은 것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동일성을 철저하게 배격한 것인데, 이런 창들이 여기저기에서 각자 상황에 따라 열리다 보면 집의 골격과 모양은 자연스럽게 다양해진다.

 

둘째, 건물의 골격이 창의 다양성을 돕는다. 창은 혼자 존재할 수는 없다. 창을 창답게 해주는 것이 건물의 골격이다. 집 전체로 보면 나무 기둥으로 이루어진 골조 위에 벽을 듬성듬성 두른 구조이다. 공간의 얼개가 느슨하다는 뜻이다. 골조는 누각구조를 지향하며 벽도 가급적 폐쇄도를 낮추려 한다. 벽의 재료가 돌이 아니고 나무와 흙을 섞었기 때문에 스스로 내력 역할은 못하지만 위치는 그만큼 자유롭다. 위아래로 창을 거느리면서 공중에 매달리듯 붙기도 한다.

 

 

주역과 경우의 수

셋째, 건물 전체의 구성이 증식과 분화로 이루어진다. ‘방-동-채-영역-건물 전체’의 단계 별로 복합 구성을 이룬다. 방이 씨앗이 되어 점차 증식되어 가는 구성이며 이 과정에서 ‘x-y'축 양 방향으로 자유롭게 분화해 나간다. 전형적인 외파 구성이다. 건물 전체로 보면 각 채가 꺾임이 많고 채와 채 사이가 적당히 떨어져 있으면서 또 적당히 맞물린다.

 

넷째, 마당이 이런 여러 조건을 잘 발휘하게 해준다. 마당은 여러 채로 분화하는 한옥의 전체구성에 여유를 주는 숨통 같은 것이며, 건물이 마음껏 활개 치며 자신의 특징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여백이자 배경 공간이다. 넉넉하면서도 아늑한 어머니의 품 같은 것이다. 비움, 불이, 중첩, 관입, 원통 같은 한옥 특유의 공간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 것도 모두 마당이 있기 때문이다.

 

 

창덕궁 연경당 집이 한 시도 같은 모습으로 있질 못하기 위해서 벽의 가변성은 필수이다. 벽체를 줄이고 창문을 늘일 것이며 그 창문은 열고 닫기가 용이할뿐더러 열고 닫는 방식도 다양해야 할 것이다.

 

 

증식과 분화로 이루어지는 한옥의 구성은 주역에 비유할 수 있다. 한옥에서 각 방 혹은 방으로 이루어지는 동은 매우 단순하다. 방은 단 겹이다. 그야말로 덩그러니 방 하나만 있다. 그 흔한 복도도 없으며 문을 열면 앞뒤 모두 바로 외기이다. 채 까지도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회첨골 정도에서만 복 겹 공간이 나타난다. 건물 윤곽을 큰 상자로 잡고 속으로 잘라 들어가 호도 속 같은 공간을 짜는 서양과 반대이다. 그 대신 한옥에서는 이렇게 단순한 방이 증식하면서 복합 공간으로 발전한다. 채가 꺾이고 마당이 들어가며 채와 채가 어울리면서 공간은 복합적이 된다.

 

이런 구성은 주역다운 세계관이다. 주역 역시 긴 막대기 하나와 짧은 막대기 하나만으로 복잡하기 그지없는 자연과 세상만물의 작동원리를 규칙화 해낸다. ‘0’과 ‘1’을 끊임없이 증식해가며 그 조합의 경우의 수에 따라 작동하는 컴퓨터도 같은 이치이다. 주역에서는 막대기 두 개를 복합 증식해서 건곤감리를 만들어내고 사주와 팔자도 만들어낸다. 다시 이것들의 조합으로 사람 사이의 관계와 나아가 사람의 운명도 유형화해 낸다. 쉽게 얘기해서 2의 제곱을 반복하면서 경우의 수를 늘려가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정성적(定性的) 내용을 실어서 사람 운명의 다양한 결에 대응시키는 것이다. 한옥의 공간 구성과 너무 닮았다.

 

 

관가정 행랑채 집이 항시 변하니 집에서 보는 풍경도 다양하다. 한 집에서 나왔다고 보기 어려운 다양한 풍경의 파노라마를 이룬다.

 

 

놀이터와 뫼비우스의 띠

한옥 공간은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었을까. 집을 하나의 큰 놀이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옥의 복합공간은 숨바꼭질 놀이에 더 없이 적합하다. 숨바꼭질이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놀이라지만 어른에게도 다른 형식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관음이다. 성도착증만은 아니다. 몸을 숨기고 드러내는 정도를 적당히 조절한다는 뜻이다. 어머니 자궁 속 같은 아늑함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자연과 소통하고 화해하는 양면성이 적절하다는 뜻이다.

  

 

충효당 집 구성이 다양하다는 것은 다양한 공간형식을 섞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집은 방과 문으로만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대청과 퇴와 누마루를 섞으면 공간은 더 없이 다양해진다.

 

 

한옥에서는 한 가지 동선에 대해 질러가기와 돌아가기가 동시에 가능하다. 지름길과 갈림길이 적절히 섞여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단 효율적이며 기능적이다. 심리적 기능도 있다. 동선에 선택권을 가질 수 있으며 실제로 여러 대안 동선 가운데 그때그때 마음 상태에 따라 골라서 선택하다 보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놀이 기능이 중요하다. 대안 동선이 많다는 것은 집안 이곳저곳을 오가는 이동을 하나의 놀이처럼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심심하다 싶을 때 동선 종류를 바꿔가며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흥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인 특유의 오밀조밀한 심성과 장난기를 집 구조에 옮겨 놓은 셈이다.

 

순수 공간의 관점에서 보면 한옥의 다양성은 뫼비우스의 띠를 구현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물론 건물은 사람이 사는 공간이기 때문에 뫼비우스의 띠와 똑같아질 수 없다. 물리적 골격이야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속에서 사람이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공간에 승부를 거는 많은 건축가들은 건물로 뫼비우스의 띠를 구현해보려고 노력해왔다. 문제는 비유이다. 한옥 공간은 뫼비우스의 띠에 비유될 만하다. 안팎의 구별이 없어지고 채와 마당이 서로를 교차해서 감싸는 공간 속에서 나의 위치는 앞뒤상하좌우를 토막 낸 확정적 지점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늘 흐르는 과정의 한 중간에 있다. 여기저기 난 구멍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공간의 여정을 거쳐 처음 자리로 되돌아온다. 토폴로지를 동선 이동과 공간 경험이라는 건축적 구성으로 치환해서 보면 한옥은 뫼비우스의 띠에 비유될 수 있다. 많은 건축가들이 구현하고 싶어 했던 그 해답이 이미 한옥에 들어있는 것이다.

 

 

 

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동서양을 막론한 건축역사와 이론을 주 전공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명비평도 함께 한다. 현재까지 3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공부로 익힌 건축이론을 설계에 응용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jyimis@empas.com
[출처]네이버캐스트 :: 오늘의 집 > 한옥미학   2010.07.08.   http://navercast.naver.com/home/koreanstyle/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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