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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학【美學】

<한옥미학 3> 한국다운 리얼리즘

by 禱憲 2010.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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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다운 리얼리즘

규칙성을 거부하는 한옥의 창문 구성

최근 우리 사회는 집을 끼고 양극단을 오가며 방황하고 있다. 부동산 투기의 광풍이 주기적으로 나라를 휩쓸며 집을 망쳐놓고 있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참살이 바람이 불고 있고 집도 이것의 주요 대상이 되고 있다. 다소 제한적이긴 하지만 집을 둘러싼 참살이 대상에 한옥이 자주 거론된다. 부동산 광풍에 한옥 바람이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한옥이 조금 밀리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긍정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한옥이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한옥의 과학성은 주로 콘크리트와 유리 중심의 산업화된 근대식 집에 대한 대안으로 거론된다.

 

물론 이것은 맞는 말이다. 한옥은 분명히 새집 증후군과 냉난방의 문제점에 대한 훌륭한 대안이다. 나무, 흙, 창호지, 기와 같은 자연재료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인체의 생체 리듬과 일체가 되며 열 조절 능력도 뛰어나다. 이 때문에 실내 마감재에 자연재료를 섞은 재료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많이 부족하다. 이것은 반드시 한옥이 아니라도 전통재료라는 관점에서 찾을 수 있는 장점들이다. 한옥은 건축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것 말고 훨씬 크고 중요한 장점들이 많다. 한옥에서 나무나 흙만 떼어내 그것을 장점이라고 하는 것은 한옥을 모욕하는 일이다. 한옥은 통째로 그 속에서 살아야 참다운 장점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리얼리즘, 인상, 순환 공간의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오죽현 한옥의 창문은 어미가 새끼를 데리고 있는 친자의 정을 표현한다.

 

 

리얼리즘은 창문의 구성에 잘 드러난다. 한옥의 창문은 불규칙하다. 행랑채처럼 기능이 중시되는 채를 제외하고 같은 창이 반복되는 법은 드물다. 이유가 있다. 너무 빤하기 때문에 너무 위대한 이유이다. 그냥 그게 좋아서이다. 조금 따져보자. 한 집에는 각기 다른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다. 이들이 자신들의 방에서 바라는 것들은 모두 다르다. 각 방들도 처한 상황들이 다 다르다. 방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다르다. 식구들이 각자 방을 차지하고 생활한다는 것은 이처럼 여러 변수를 가지고 있다. 절대 한 가지 같은 패턴으로 고정될 수 없는 이유이다. 한옥처럼 각 방의 창들이 제각각 다르게 나타나야 하는 이유이다. 이 창문이 이 크기 이 형상으로 이쪽 구석에, 저 창문이 저 크기 저 형상으로 저쪽 위에 난 이유는 그것이 그 방속에 사는 사람한테 가장 잘 맞기 때문이다.

 

 

한옥은 가족살이를 건축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상식적인 이유가 왜 위대한가. 창문은 방 안에 사는 사람이 외부와 소통하는 숨통이다. 경치나 옆방 같은 주변 환경에 대한 태도에서부터 햇빛, 바람, 하늘 같은 자연 환경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런 태도들은 방 안에 사는 사람의 정신적, 심리적, 정서적 건강과 직결되는 중요성을 갖는다. 방안에 사는 사람들이 각각의 인격체로서 모두 다른 개성이 있고 그런 다름이 존중되고 지켜져야 되는 것과 똑같이 창문도 크기, 형상, 위치, 개수 등에서 자유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이런 자유가 한옥에 나타난 리얼리즘의 첫 번째 요체이다.

 

 

선교장 창문이 여럿 모이면 가족살이를 그대로 드러낸다. 각자 자기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편하게 어울리는 모습이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옥의 창문은 한국의 전통적인 민족정서나 인간관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리얼리즘의 정수이다. 한옥의 창문들을 보고 있노라면 고즈넉한 겸손이나 넉넉한 여유 같은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가 물씬 느껴진다. 이런 정서를 대표하는 것이 가족살이에 유추될 수 있는 인간관계이다. 한옥의 창문에는 이 가운데에서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친자의 정이 특히 많이 표현된다. 큰 창문이 작은 창문을 데리고 나란히 나 있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훈훈해진다. 너무나 닮은 모습으로 친자의 정을 표현한다. 어미가 새끼를 거느린 형국이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 한 마디면 충분하다. 모든 한국인들이 가슴 시려하며 똑같이 나누어 갖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정서이다. 작은 창문의 방이 자녀의 방이고 큰 창문의 방이 부모의 방이기 때문에 이런 은유는 더 제격이다.

 

인상은 품새에 잘 나타난다. 품새란 집의 내용과 형식 사이의 일체를 의미한다. 외관에 나타나는 집의 모습은 형식이며 이것은 그 집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의 분위기인 내용이 반영된 결과라는 의미이다. 품새란 내용으로 말미암는 형식이 얼마나 보기 좋고 품위가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다 혹은 형식이 표현해주는 내용이 얼마나 내실 있고 격조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다. 인상은 이런 품새의 종합적 상태이다.

 

한옥의 전경은 인상을 드러낸다. 멀리서 눈을 지그시 감고 뒷짐을 진 채 집의 앉은 품새를 보면 그 집의 길흉과 가풍을 점칠 수 있는 우리만의 전통적인 지혜, 이것이 한옥이 갖는 인상의 기능이다. 한 마디로 집안이 경박한지 점잖은지가 가감 없이 진솔하게 집의 외관과 모습에 반영된 상태를 의미한다. 사람의 얼굴 인상조차도 마음속 상태의 발로일진대 집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싸움이 잦은 집안은 서까래 하나를 올려도 티가 나는 법이다. 반대로 화목한 집안은 문짝 하나를 달아도 또 티가 나는 법이다.

 

 

안동 전주 류씨 무실종택(수곡종택) 반듯한 품새와 수평선의 중첩을 통해 탕탕한 기운을 집의 인상으로 보여준다.

 

 

정이 깊고 기가 융성하는 한옥

인상은 정심(情深)과 기성(氣盛)으로 발전한다. 정심이란 말 그대로 정이 깊은 상태를 의미하는데, 집에 적용시키면 건축 구성의 반듯함, 장식사용의 똑바름, 축조의 알맞은 짜임새 등과 같이 건설 단계에서 확보되는 외형적 감정이다. 집을 지은 목적, 장인의 건축 행위, 집 주인의 기대와 성품 등이 하나로 어우러져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힘이다. 가세를 솔직하게 표현하려는 것 이상의 욕심을 바라지 않는 절욕의 멋이다. 과시적 허망을 배제한 상태가 만들어내는 집의 정직한 품격이다. 기성은 정심이 발전해서 기가 전성을 누리는 상태이다. 집에서 느껴지는 인간적 풍부함, 쓰임새의 친절함, 인간을 돕고자 하는 친밀감과 우호감, 탕탕한 가풍, 호연한 풍모 등에 유추될 수 있다.

 

정심의 상태로 지어진 집을 오랜 기간 즐겁게 사용하다 보면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기품이 쌓인 상태이다. 집은 사람을 이롭게 하고 사람은 집을 아끼는 상호 존중과 애호가 쌓여 집안이 화목하고 융성해진 상태이다. 혹은 이런 상태에서만 느낄 수 있는,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애(靄靄)와 풍요의 상태이다.

 

순환 공간은 전체 구성에 잘 나타난다. 한옥의 실내 구성은 막히거나 일직선이 아니라 돌고 돈다. 술래잡기를 해보면 안다. 숨을 곳도 많고 도망칠 구멍도 많다. 순환성이다. 순환은 여러 형식으로 나타난다.

 

외부에서 창과 방을 지난다고 끝이 아니라 다시 외부로 나올 수 있다. 그랬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며 또 다시 외부로 나갈 수 있다. 각 방들은 크기와 위치가 조금씩 어긋나지만 창을 모두 열면 꼬챙이로 꿸 수 있는 일직선 축이 형성된다. 이 축은 곧 바람이 통하는 길이다. 순환이란 ‘통(通)’이다. 통은 자연현상 가운데 음양이 협조하고 정기가 유창하여 아름다움에 이른 상태로 정의된다. 한비는 말한다. “자연에서는 음양(=정기)이 작동하고 변화하여 만물을 만들어낸다. 날고 달리기에 나아가며, 아름답기에 좋고, 자라기에 기르며, 지혜롭기에 맑은 상태이다. 물을 뚫어 썩음을 막고 병을 쫓아 악을 차단한다.”


하회마을 북촌댁 한옥의 공간은 순환한다.막힘 없이 통한다.

 

 

순환 공간은 한 마디로 집 안 내부적으로, 그리고 집 안과 집 밖 사이에 막힘이 없이 두루 통한다는 의미이다. 여름에 바람을 받아들이고 겨울에 햇빛을 받아들이는 열린 자연관이라는 의미이다. 이 방과 저 방 사이에 단절이 아닌 소통이 유지된다는 의미이다.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되 다양한 간접 소통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자연과 통하니 육체가 건강하고 사람과 통하니 정신과 마음이 건강하다. 집이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를 해준 셈이다. 집이 인간에게 병을 주고 인간의 마음을 해치는 콘크리트 아파트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우월성이다.

 

 

 

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동서양을 막론한 건축역사와 이론을 주 전공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명비평도 함께 한다. 현재까지 3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공부로 익힌 건축이론을 설계에 응용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jyimis@empas.com
[출처]네이버캐스트 :: 오늘의 집 > 한옥미학   2010.03.08.   http://navercast.naver.com/home/koreanstyle/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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