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학【美學】
<한옥미학 11> 중첩
by 禱憲
2010. 8. 1.
창이 두 겹 겹치는 ‘중첩’
한옥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장면 가운데 하나가 창문 속에 또 창문이 있고 그 밖에 풍경이 보이는 경우이다. 이른바 ‘액자 속 액자’이다. 액자가 두 개 이상이라는 뜻이다. 풍경요소는 하나로 고정되어 있고 이것을 여러 개의 액자가 앞뒤로 거리 차이를 가지며 겹쳐서 담아낸다. ‘풍경 속 풍경’이라고도 한다. 첫 번째 창문 속 큰 장면이 첫 번째 풍경이고 다시 그 속에 두 번째 창문이 들어가면서 두 번째 풍경을 담는다. 웬만큼 큰 한옥이면 집 전체에서 이런 장면이 몇 개는 만들어진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의도된 느낌이 강하다. 마주보거나 앞뒤로 늘어서는 등 창문들 사이의 관계나 풍경요소의 위치 등이 ‘액자 속 액자’를 염두에 두고 짠 것 같다. | |
이런 특이한 장면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중첩’이라는 한옥의 공간 구조에 있다. 한옥은 공간 켜가 많다. 어려운 말 같지만 그렇지 않다. 방의 앞뒤로 마당이 있고 마당 건너 다른 방이 있으며 다시 문과 담 너머 다른 채가 있는 한옥의 구조를 생각하면 된다. 한 마디로 복잡하다는 것이고 이는 곧 집이 여러 겹 겹친다는 뜻인데, 이를 지칭하는 공간미학 개념이 중첩이라는 것이다. 그냥 겹치게 하긴 쉬운데 그러다간 혼란스러워지기만 할 뿐, 이것이 일정한 공간형식을 갖춰서 심미성을 갖도록 정리한 개념이 ‘중첩’이다. 공간형식을 기준으로 하면 채 분리와 꺾임이 많고 그 사이에 마당을 끼워 넣은 구성에서 기인한다.
중첩은 한옥만의 특징은 아니고 한국다운 국민성 전반에 깔린 특징이다. 사물을 단정적으로 둘로 가르지 않고 중간적 태도를 취하는 상대주의 국민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중첩은 의복, 음식, 대화법, 사람 사이의 관계 등 여러 곳에 나타난다. 중첩은 풍경작용에서도 나타난다. 대표적인 경우가 이쪽 문에서 반대편 문을 통해 건너편 장면을 보는 경우이다. 내 앞에 액자가 하나 있고 그 속에 방의 공간 켜를 지나 반대편에 액자가 하나 더 들어있다. 다시 그 속에 마지막으로 풍경이 담긴다. 공간 중첩이 풍경 중첩으로 형식화되는 순간이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창문과 건너편 풍경 모습이 짜 맞춘 듯 일직선 축 위에 놓이면서 잘 들어맞는다. 마치 누군가 액자 속에 그림을 정성 들여 담아 걸어놓은 것 같은 장면이다. 중첩을 괜히 중첩시킨 것이 아니라 ‘풍경 속 풍경’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했다는 뜻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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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 이쪽 문 속에 있고 그 속에 방이 있으며 맞은편이 문이 하나 더 있고 마지막으로 그 속에 풍경이 담긴다. | |
한옥의 백미 ‘액자 속 액자’
대청 뒷마당에서 대청 뒷문을 열고 안마당을 바라보는 경우도 ‘액자 속 액자’가 일어난다. 내가 서 있는 쪽에 대청 뒷면의 창이 하나 나고 그 속에 대청이라는 공간 켜가 하나 있으며 반대편에 대청 앞 기둥과 지붕이 한정하는 액자가 하나 더 있다. 이 두 번째 액자 속에 들어오는 요소가 풍경화를 만들어낸다. 안 행랑채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곳에 중문이 들어서면 중첩이 한 번 더 계속된다. 중문 자체가 또 하나의 액자가 되면서 모두 세 겹의 액자가 겹치게 된다. 한옥의 백미 가운데 하나이다. 많은 한국 현대 건축가들이 현대적으로 재생해내고 싶어 했던 공간 구조이다.
‘액자 속 액자’가 일어나는 또 다른 장소로 안채의 부엌과 광을 들 수 있다. 위치로 보면 안채에서 뻗어 나온 팔의 양쪽 끄트머리 부분이다. 안채는 전체 형태가 ‘ㄷ’자 형이나 ‘ㅁ’형이 대부분이라서 대청에서 양 옆으로 뻗어 나온 두 팔이 만들어진다. 이곳에는 자녀들의 방과 함께 부엌과 광이 들어간다. 부엌과 광은 대청 쪽에 가깝게 붙기도 하지만 대청에서 먼 팔의 끄트머리에 들어가기도 한다. 집이 큰 경우 끄트머리 두 부분이 모두 광이나 부엌으로 사용된다. 부엌과 광은 기능은 다르지만 공간구조는 비슷한데, 앞뒤로 벽 전체를 거의 다 차지하는 큰 나무 문이 나는 형식이다. 흔히 ‘광 문’이라고 부르는 문인데, 부엌에도 같은 문을 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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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 사랑채 대청 뒤에서 창문을 통해 앞을 보면 ‘액자 속 액자’가 일어난다. 뒷마당은 못 쓰는 물건이나 재어 놓는 버려진 공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풍경작용을 만들어내는 살아있는 공간이다. |
김동수 고택 광 뒷마당에서 네 개의 문을 모두 열고 건너편 광 쪽을 바라보면 액자가 네 개 겹치는 풍경 중첩이 일어난다. |
양쪽 팔 끄트머리에 이런 공간이 하나씩 들어있을 경우 참으로 풍부한 ‘액자 속 액자’의 풍경놀이를 즐길 수 있다. 모두 네 개의 문이 일렬로 늘어서는 형식이 된다. 네 개의 문을 다 연 다음 부엌이나 광 뒤쪽 마당에서 안을 통해 건너편 부엌이나 광 쪽을 바라다보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액자가 네 개나 겹치게 된다. 꼬챙이에 산적을 꿴 형국이다. 너무 과하다 싶으면 안으로 들어가서 건너다보면 액자가 세 개 겹친다. 발걸음을 좀 더 옮겨 안마당으로 나와 광 문 앞에 서서 부엌이나 광을 바라보면 액자가 두 개가 된다. 연차적으로 ‘줌 인(zoom in)'이 일어나는 영화기법이 일어나는 곳이다. 한옥의 또 다른 백미 가운데 하나이다. 여담이지만, 한옥의 백미에는 사랑채의 활짝 편 지붕처럼 노골적이고 과시적인 것도 있지만, 앞에 얘기한 대청 뒷면이나 이곳 부엌처럼 공간의 중첩이 극대화되는 은근한 곳도 있다. | |
한옥만의 독특한 공간 구조가 만들어내는 기묘한 현상
풍경 중첩 혹은 ‘액자 속 액자’는 한옥만의 독특한 공간 구조가 만들어내는 기묘한 현상이다. 방의 앞뒤 양면에 창을 내는 구조이다. 방의 한쪽은 복도로 막히면서 문이 나는 것이 전 세계 주택의 공통적 구성인데, 한옥의 방만 유독 두 면, 심지어 세 면이 외기와 면하는 독특한 구조를 갖는다. 방안에서 어느 문을 열어도 바로 바깥이다. 이 문제는 확장하면 한옥의 장단점과 연관이 깊다. 가장 큰 단점은 외풍이 세고 겨울에 춥다는 점이다. 열효율 면에서는 분명 불리하다. 아파트에서 가장 따뜻한 방은 집 한 가운데 들어있어서 창이 하나도 없는 화장실이라는 사실을 뒤집어 생각하면 된다. 비바람에 노출되기 때문에 마모가 많이 일어나 유지관리와 보수에 잔손이 많이 간다는 점도 불리할 수 있다. 흔히 한옥이 불편하다고 하는 내용들이다. | |
장점도 있다. 겨울에 추운 것을 감수하고라도 굳이 이렇게 만든 이유가 있을 터인데 그것은 불이사상 때문이다. 공간의 안팎을 다른 것으로 분별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외기와의 단절을 최소화해서 바깥을 항상 손쉽게 접할 수 있게 하겠다는 의도이다. 방 하나가 가급적 외기를 많이 면하게 하고 창문을 여러 곳에 낸다. 한 면에 창문이 두 개 이상 나기도 한다. 채의 끄트머리에 있는 방은 세 면이 외기를 면하면서 그 세 면에 모두 창문이 난다. 심한 경우 방 하나에 문이 다섯 개, 여섯 개씩 나기도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문이 모두 열리면서 바로 바깥과 통한다는 점이다. 산업화 이후 대표주자가 된 전면유리를 훨씬 능가한다. 전면유리는 시각적으로는 모두 열려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은 하나만 내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이런 특징이 또 다른 단점이 될 수도 있다. 방은 아늑하고 실내다워야지 한(寒) 데에 텐트 하나 친 정도여서야 어디 그게 방이냐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아파트에 익숙한 사람이 시골 진짜 한옥에서 자게 되면 첫날밤은 대부분 신경이 곤두서서 뜬눈으로 보내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뒤집어 보면 그만큼 바깥과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아서 항상 바깥과 함께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해준다는 뜻이 된다. 소극적 의미의 ‘친 자연’이다. 방안 어느 곳에서든지 다섯 걸음 이내에 바깥을 접할 수 있게 해준다.
한옥만의 이런 특징이 공간에서는 중첩으로, 풍경작용에서는 ‘액자 속 액자’라는 독특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 자체만으로도 불이사상이라는 당시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반영한 것일진대, 그렇게 집을 짓다 보니 거기에 따른 여러 가지 조형작용과 심미작용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정신적 가치에 따라 집을 지었을 때 나타나는 좋은 점이며, 전통건축이 우수한 이유이기도 하다. 기능과 효율과 돈 논리에 따라서 집을 짓는 요즘은 접할 수 없는 문화적 깊이이다. 바깥 대상과 안쪽 나 사이의 관계를 편 가름하지 않고 소통 통로를 다원화하려는 철학이 집에 녹아 든 결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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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이노당 앞뒤 창문과 건너편 집 모습이 일직선에 놓이며 ‘액자 속 액자’를 만드는 모습은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다. 외풍이 센 단점을 감수하고서 풍경작용을 선택한 이유이다. | |
- 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 동서양을 막론한 건축역사와 이론을 주 전공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명비평도 함께 한다. 현재까지 3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공부로 익힌 건축이론을 설계에 응용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jyimis@empas.com
[출처]네이버캐스트 :: 오늘의 집 > 한옥미학 2010.05.02.
http://navercast.naver.com/home/koreanstyle/25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