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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늘【天】

역사의 기억 - 광해군의 투항주의와 인조의 모험주의

by 禱憲 2008.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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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억 - 광해군의 투항주의와 인조의 모험주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한다’   [등록일 : 2006-05-03]


배기찬 동북아시대위원회 비서관

 “징비(懲毖), 내가 겪은 환란을 교훈삼아 후일에 닥칠 우환을 경계한다는 말이다. 류성룡은 일본과의 7년 전쟁을 겪고 난 뒤 다시는 그런 치욕을 당하지 않도록 『징비록』을 썼다. 그러나 그 책을 쓴지 한 세대 만에 조선은 여진(청)에게 두 차례에 걸쳐 굴욕적 패배를 당했다.


통사(痛史), 뼈아픈 역사의 기록이다. 박은식은 1백년 전에 『한국통사』를 썼다. 그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뒤 다시는 역사적 통찰력과 세계적 안목의 부족으로 나라가 망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책을 쓴지 반세기도 못 돼 한국은 분단되었고, 세계적 전쟁이 한반도를 휩쓸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한다’는 말이 있다. 역사전쟁과 영토분쟁, 민족주의와 군비경쟁이 치열해지는 21세기의 동아시아정세 속에서 우리가 지난 100년 전의 역사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망각의 역사가 얼마나 우리 역사를 폐허로 만들었는지를 다시 한 번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필자가 쓴 책『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에 있는「광해군의 투항주의, 인조의 모험주의」를 전재한다.



1598년, 아시아정복의 야망으로 가득찼던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7년에 걸친 ‘코리아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도 끝났다. 중국정복의 야욕을 가졌던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도 같은 해에 사망했다.


이 1598년에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평정하고, 두만강 유역과 길림 일대에 세력을 더욱 확장했다. 누르하치는 우선 혼인으로 여러 부족과 혈연관계를 맺어 세력을 확장하는 한편, 기존의 여진사회에서 전투나 수렵 때 사용된 기본조직을 강력한 팔기제도로 발전시켰다. 이 팔기제도는 1601년 누르하치가 창설한 만주족의 독자적인 제도로, 호구통계·징집·징세·병력동원을 위한 행정제도인 동시에 국민개병제적인 군사제도로서, 중국의 정복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누르하치는 한인과 몽골인도 이 팔기에 포함시키고, 한인 유력자를 왕으로 봉함으로써 체제의 통합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뛰어난 통합력을 발휘한 누르하치는 1605년 요동반도를 제외한 동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조선에 국서를 보내 ‘왕’이라 자칭했다. 나아가 1608년에는 명에 바치던 조공을 끊고 명에 대항하는 독립된 국가를 지향했다. 이 1608년에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다.


코리아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에 왕위 오른 광해군

광해군은 코리아의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에 왕위에 올랐다. 7년 전쟁으로 인구는 격감하고, 국토는 황폐해졌으며, 왕궁들도 불타버렸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피해는 제대로 복구되지 못했다. 일본과는 국교를 정상화하지 못했고, 중국은 7년 전쟁에서 도와준 은혜를 갚으라며 경제적·군사적 압박을 가해왔다. 여기에 이미 20년 전부터 세력을 키워온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드디어 명과의 조공을 끊고 제국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광해군은 머리가 영리했지만 여러모로 취약했다. 우선 왕후 태생이 아닌 후빈 태생으로 서자인데다가, 그것도 맏이가 아닌 차남이었다. 그리고 선조가 뒤늦게 어린 왕후를 맞이해 죽기 3년 전에 적자 영창군을 낳았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는 것도, 왕위를 유지하는 것도 힘이 들었다. 당시의 패권국이었던 명은 오랫동안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을 승인하지 않았고, 조선의 주류들도 광해군을 왕으로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권이 참으로 불안정했다. 광해군은 아버지인 선조를 대신해 분조를 이끌면서 일선에서 7년 전쟁을 이끈 적이 있었다. 전쟁을 이끌면서 현실의 세력관계에 민감해졌고 또한 소심해졌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조선의 실상을 알게 되었고, 국제정세에 예민한 감각이 생겨났다. 반면 두려움도 엄습했다.


이러한 객관적, 주체적 조건에서 새로 즉위한 왕은 어떤 정책을 펴야 했을까? 어떻게 해야 내우외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네 가지의 주요정책을 추진한다.


첫째 민생안정 정책. 즉위 직후인 1608년 5월 경기도 지역에서 대동법을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공물을 현물이 아닌 쌀로 내게 만든 이 법을 백성들은 크게 환영했다. 반면 공물 방납으로 이익을 보던 무리들은 아우성을 쳤다. 그리고 전란 중에 유실된 사서 등 각종 서적을 다시 찍어냈다. 귀양 중인 허준에게『동의보감』을 출판케 해 당시에 만연하던 질병을 치유하려 했다.


둘째,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정적을 숙청하고, 대대적으로 궁궐을 중건·신축했다. 정적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친형인 임해군과 이복동생인 영창군이 살해당하고, 인목대비를 폐하려고 했다. 수많은 사람이 역모로 처형되거나 유배되었고, 정권의 기반은 점점 협소해졌다. 특히 광해군은 전란으로 불타버린 궁궐 등 왕실과 관련된 건축물을 새로 짓고 화려하게 꾸미는 데 열심이었다. 1608년 종묘 중건을 마치고, 1611년에는 창덕궁을 중건하고, 창경궁을 중수했다. 그리고 자수궁을 짓고, 창덕궁 크기의 경덕궁을 신축했다. 나아가 경복궁의 10배 규모로 어마어마하게 큰 인경궁을 짓기 시작했다. 또한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내기 위해 원구단을 지었다. 이에 필요한 엄청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공명첩을 남발하고, 돈(贖罪銀)을 받고 죄인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강압적인 방법으로 국민 전체에게 부담을 전가했다.


셋째, 여진족에 대한 대책으로 정보를 대대적으로 수집하는 한편, 방어책을 마련한다. 광해군은 친히 전투훈련을 참관하고 방어진지를 점검했다. 그리고 누르하치의 철기군(鐵騎軍)에 대항할 무기는 화포밖에 없다고 보고, 1613년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확대개편하고, 파진포 등 각종 화포를 생산케 했다. 그리고 변방 수령을 대부분 무인으로 임명하고, 수시로 무과를 실시해 장교를 양성하고 병력도 확충했다.


넷째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상황에서 남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광해군은 빗발치는 반대를 무릅쓰고 1609년 기유약조를 맺어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다. 7년 전쟁이 끝난 지 10년밖에 안되어 반일정서가 팽배했던 시기에 국교를 재개한 광해군의 외교적 안목은 뛰어난 점이 있었다.


문명과 야만의 대립, 어려운 선택의 순간

1616년 드디어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국호로, 연호를 천명(天命)으로 하는 국가를 수립했다. 이제 동북아시아에서 전쟁을 피할 수가 없었다. 1614년부터 조선에 후금토벌을 위한 병력준비를 요구했던 명은 1618년 공동으로 후금을 공격하자고 강요했다. 코리아에 참으로 어려운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대륙에 다시 문명과 야만의 2개 국가가 대립한 것이다. 코리아의 운명이 위기로 다가왔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전략을 수립하고, 선택하고, 결단할 것인가?


우선 코리아의 역사에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600년 전인 10세기 초 고려는 북의 요(거란)와 남의 송이라는 대륙의 양대 국가를 놓고 갈등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요를 이어 여진족의 아골타가 금을 세웠을 때 똑같은 고민을 했다. 거란의 요와는 수차례의 전쟁을 통해 패하지는 않았으나, 형식적인 조공관계를 맺어 북방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요에 패하지 않고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송과도 관계를 끊지 않고 외교통상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소극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균형외교가 가능했다. 그리고 금이 요를 격파해 우세가 확연히 드러났을 때에는 금과 전쟁을 하지 않고 조공관계를 맺었다. 대적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남송과는 무역관계만 유지했다.


고려사를 읽은 광해군은 금을 세운 아골타의 사례를 자주 거론했다. 싸우지 않고 복속한 고려 인종이 그의 모델이 되었다. 무력 앞에서의 ‘현실과 국익’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1621년 6월 6일『광해군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위태로우니 이러한 때에는 안으로는 자강을 꾀하고, 밖으로는 기미(羈縻)하여, 한결같이 고려가 했던 것처럼 해야만 나라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래 우리나라의 인심을 보면, 안으로는 일을 분변하지 못하면서 밖으로는 큰 소리만 친다. 시험삼아 조정 신료들이 의견을 모은 것을 보면, 장수들이 말한 것은 전부 압록강변에 나아가 결전해야 한다는 것이니, 그 뜻은 참으로 가상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무사들은 무슨 연고로 서쪽 변방을 ‘죽을 곳’으로 여겨 부임하기를 두려워하는가? 생각이 한참 미치지 못하고 한갓 헛소리들뿐이다. 강홍립이 보내온 편지를 보는 것이 무슨 방해될 일이 있는가? 이것이 과연 적과 화친을 하자는 뜻이겠는가? 우리나라 사람은 허풍 때문에 끝내 나라를 망칠 것이다.”


역사의 패턴은 반복되나 그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조선 광해군이 맞은 상황은 500년의 시차가 있지만 고려 인종이 맞은 상황과 너무나 유사했다. 북방(XB)의 위협세력은 똑같은 여진족이고 국호도 같은 금(金)이다. 건국자가 아골타에서 누르하치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중원(XA)도 똑같이 한족계의 송과 명이다. 송과 명은 문명적인 차원에서 코리아와 궤를 같이 하지만 무력적인 측면에서 금을 감당하기엔 한계가 있다. 역사의 패턴은 반복된다. 그러나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1620년대의 광해군이 500년 전인 1120년대 고려 인종의 노선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과연 가능했고, 또 바람직한 것이었는가? 그렇지 않은 이유를 살펴보자.


500년 전의 고려 인종대와 조선 광해군대의 가장 큰 차이는 중국과 코리아의 관계였다. 명과 조선의 관계는 송과 고려의 관계와 전혀 달랐다. 송(宋)은 처음부터 고려와 아무런 군사적 관계가 없었고, 고려가 도움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러나 명은 14만의 대군을 파병해 이여송의 말대로 망해가는 조선을 살려주었다. 비록 명이 전쟁 뒤 여러 가지로 조선을 괴롭혔지만, 여전히 조선의 혈맹이었다. 후금정벌의 총사령관 요동경략 양호(楊鎬)처럼 대일전쟁에 참전했던 이들이 대부분 대후금전쟁의 사령관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둘째 조선인도 고려인과 달랐다. 정부의 최고지도층에서 지방의 촌 동네에 이르기까지 중화사상과 숭명사대주의(父子之義)가 널리 퍼져있었고, 조선을 제2건국시킨 은혜(再造之恩)를 갚아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수직적 동맹관계에 있는 혈맹을 배신할 수 없다는 ‘대의와 명분’이다.


셋째 고려인종과 광해군의 시기에 여진의 군사력도 차이가 있었다. 1117년, 아직은 세력이 약했던 금나라의 아골타가 고려 예종에게 화친조약을 제의했을 때 고려는 전쟁준비에 돌입했다. 그러나 그 10년 뒤 금(金)이 대륙을 반분한 요를 멸망시켰을 때, 나아가 송(宋)이 금에 굴복할 정도로 금의 군사력이 막강해졌을 때 비로소 금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1608년 광해군이 집권했을 때 여진은 아직 만주지역도 석권하지 못했고, 1621년에야 만주지역의 중심을 차지한다. 고려 예종·인종대와 비교해 광해군대의 여진은 그토록 강력한 군사력이 아니었다. 물론 ‘7년 전쟁’을 치른 조선의 군사력이 고려에 비해 훨씬 약했다는 점은 분명히 계산해야 한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누르하치의 대명전쟁노선이 분명해졌을 때인 1608년에 집권한 광해군은 결전의 자세로 전쟁을 준비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화친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후금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쟁을 중단해 나라를 통합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과도하게 궁궐공사를 벌이지 말았어야 했다. 북쪽 여진족의 위협은 이미 1580년대부터 제기되었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때에는 누르하치의 위협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7년 전쟁의 피폐와 여진족의 위협으로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되었는데, 광해군은 어떻게 해서 조선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거대한 궁궐건축에 몰두할 수 있었는가? 특히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이 후금군에게 대패한 뒤에도 광해군은 무슨 생각으로 궁궐건축에 몰두했는가? 광해군의 영건사업에 대해 당시 훌륭한 관리로 명성이 높았던 이창정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민족의 명운 걸린 문제 너무 쉽게 생각

“지금 누르하치는 사납고 교만한데 중국은 군대를 잃어 요동민들은 전부 피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의 두 장수는 항복하고 3군은 오랑캐에게 패몰되어, 변방은 이미 비었고 군량은 모두 없어졌습니다. 적이 또 다시 틈을 노려 우리를 삼키려 하니, 묘당이 강구해야 할 바는 마땅히 자강을 급무로 삼는 것입니다. 궁궐건축을 위한 기관들을 없애 건축을 중지하고,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고, 금고를 덜어서 병력을 기르고, 탐오한 자를 제거해 백성들의 힘을 펴주어야 합니다. 절의를 숭상하여 사기를 기르고, 장수를 선발하고 수령을 신중히 뽑으며, 군사를 다스리고 병기를 단련하여, 오로지 적을 막는 것을 도모해야 합니다.”


이창정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7년 전쟁의 참화를 겪은 광해군이 이토록 궁궐건축에 몰두한 것은 여진족의 군사적 위협을 ‘위협’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 고려 인종이 했던 것처럼, 누르하치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민족의 명운이 걸린 문제를 너무나 쉽고 간단히 생각했다. 위기를 위기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군사력 확충보다 내부의 권력투쟁과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는 토목공사에 열중했다.


1608년 광해군이 집권했을 때 결사항전의 자세로 전쟁에 대비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7년 전쟁에서 상대적으로 타격이 덜한 함경·평안·황해도에 전력을 다해 성을 쌓고, 군대를 기르고, 무기를 제조하고, 군량미를 확보했다면, 그리고 역사를 읽으며 전략전술을 세워 두었다면, 광해군이 결사적인 자세로 이 노선을 추진했다면 전 국민을 하나로 결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7년 전쟁을 치러본 경험이 있었고, 문명을 공유하고 대일전에 참전한 명과 대후금 공조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라의 지도층들은 조선의 아래에 있었던 ‘야만적’인 여진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이런 노선을 견지했다면 후금에 승리하지는 못했다 해도 참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거란의 침략을 격퇴한 고려와 같이 후금의 공격을 막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고, 후금이 산해관을 지나 명을 공격하는데 조선이 큰 장애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고려 인종대보다 조선 광해군대가 전쟁의 참화로 더욱 피폐해있었고, 명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이 1644년까지 살아남았다는 점은 그 당시에 결정적으로 약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세의 급변으로 설사 고려 인종처럼 후금과 화친(조공책봉)하더라도 조선은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금 투항노선 견지, 조선은 더욱 약해져

결국 중국과 함께 한 일본과의 ‘7년 전쟁’으로 조선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이 운명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명과의 수직적 상호방위동맹을 파기할 수 없고, 여론 주도층의 생각을 일시에 바꿀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운명으로 다가온 이 길에서 도망치려 했다. 여진의 무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패배주의의 일종인 ‘후금 투항노선’을 견지했다. 1619년 우여곡절 끝에 파병된 군대는 왕의 의향을 읽고 제대로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5천명의 정예조총부대를 비롯해 항복한 1만의 조선군은 모두 후금에 편입되었다. 조선의 후금 토벌군 대장 강홍립은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향도가 되어 조선침략의 선봉에 세워졌다.


후금 투항노선은 후금을 더욱 강하게 하고, 조선을 더욱 약하게 만들었다. 원 세조 쿠빌라이의 말처럼, 몽골의 그 강력한 군대가 수·당의 100만 대군을 맞서 싸운 고구려의 명성 때문에 고려공략에 한계를 느꼈던 역사의 사례를 생각하면, 지더라도 용맹스럽게 져야 역사에 도움이 된다. 만주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조선군이 투항한 것은 조선에 있는 전체 조선군의 사기를 땅에 떨어뜨렸다.


물론 이 당시 명·조연합군의 대후금 선제공격은 대단히 무모했다. 후금이라는 도전국의 패권을 막기 위한 예방공격에서 실패할 경우 패권국이 치명상을 입는 것도 사실이다. 광해군의 생각처럼 선제공격보다 방어전략이 더 올바른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후금전쟁은 전략전술의 문제가 아니라 노선의 문제였다.


여진족인 금의 아골타와 후금의 누르하치, 송과 명, 고려 인종과 자신을 동일시한 광해군은 역사의 포로가 되었다. 광해군은 선조를 대신해 전쟁을 총괄한 7년 전쟁의 충격이 너무나 컸고, 금과 후금, 송과 명이 아주 유사했기 때문에 현실의 국제관계를 모두 이 관점에서 해석했다. 역사의 유사성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역사의 주술(呪術)에 걸렸다. 광해군은 고려사를 잘못 읽은 것이다.


역사의 유사성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광해군

이에 대해 1623년 ‘현실과 세력’은 무시하고 ‘대의와 명분’만을 추구하는 정파인 서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내세워 권력을 차지했다. ‘명에 대한 배은망덕’과 ‘후금과의 화친’이 쿠데타의 이유였다. 그러나 이 서인의 결정적 문제점은 끊임없이 전쟁을 주장하나 전쟁을 준비하지는 않고, 강경한 항전을 주장하나 결사(決死)하지 않으며, 결국은 스스로 나가 싸우지 않고 오직 화친하는 것만을 반대한다(斥和)는 점이다. 이것은 ‘7년 전쟁’에서 서인의 수장 윤두수에게서 이미 나타났고, 1627년과 1636년 청나라의 침공시 ‘척화론’으로 입증된 것이다.


 1627년 후금이 침공할 때까지 약 4년의 시간이 있었지만, 서인정권은 권력투쟁에 빠졌다. 정변의 공로를 다투는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군대를 제대로 양성하지 않았고, 국방상의 요지에 제대로 된 방어시설도 갖추지 않았다. 정묘호란 때 후금의 군대는 3만명에 불과했으나, 후금과의 전쟁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정권은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 후금군이 압록강을 넘고 안주를 점령했을 때, 비로소 전국에 군사를 모으러 다녔다. 왕은 친히 전쟁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왕권을 둘로 나누고(分朝), 수도를 버리고 피신한다. 그리고 명의 구원을 요청하고 기대한다. 이것은 1636년 청 태종이 침략할 때에도 그대로 반복된다.


서인쿠데타의 모험주의는 광해군의 투항주의보다 훨씬 나쁜 결과를 낳았다. 사실 서인이 쿠데타를 일으킬 무렵에는 이미 되돌리기 힘들 정도로 후금의 세력이 커져 있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할 무렵에는 대여진 전쟁준비노선이 옳았을지 모르나, 이 때는 벌써 시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1623의 시점에서는 대세가 후금으로 기울고 있었다. 1619년 ‘사르후전투’에서 조선군 1만3천명이 포함된 명·조연합군 10만이 후금군과 싸워 대패한 것이 분수령이 되었다. 1621년 후금이 요양과 심양을 함락해 만주 중심부를 석권했을 때, 후금이라는 태양은 벌써 동산 위에 떠올라 기세가 등등해지고 있었다. 대의명분으로는 광해군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지만, 운명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면, 서인은 광해군의 노선을 현실로 받아들였어야 하지 않았을까? 특히 민족의 존망이 걸린 순간에는 이해와 감정을 떠나 현실을 더욱 꼼꼼히 살펴야 하지 않았을까?


전쟁사를 보면 패해서 복속할 경우와 패하지 않고 복속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특히 아군이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여, 결사 항전할 경우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는 정도의 전력을 확보하고 있는 상태에서 복속한다면, 형식적으로는 복속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상당한 자율권을 누리게 된다. 아골타의 금에 고려 인종이 복속한 것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서인의 쿠데타, 코리아의 운명 왜곡

그러나 패하고 난 뒤, 그것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해 군사력이 형편없음을 입증한 뒤 복속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그래서 서인이 옹립한 인조는 코리아의 역사상 최초로 적국의 수장 앞에 나가서 무릎 끓고 절하며 항복하는 왕이 되었다. 명의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라 명의 한쪽 팔이 잘려나간 것이다. 후금과 친하게 지낸 것이 아니라 굴욕적으로 항복한 것이다. 서인은 광해군보다 오히려 더 대의명분을 잃었다. 인조반정의 대의를 스스로 배신한 것이다.


서인의 쿠데타와 대후금전쟁의 허망한 패배는 코리아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왜곡시켰다. 조선은 이제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며 명분의 허상만을 추구한다. 무력한 현실과 아련한 허상이 결국 돈키호테를 만들어낸다. ‘코리아의 운명’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후 서인계열에 의해 주도된 대청복수론, 북벌론은 참으로 유치하고 또 그 만큼 위험한 불장난에 불과하다. 낡은 창을 들고 늙은 말을 타고 풍차로 돌진하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서인계열의 지도층은 다를 바가 없었다. 코리아의 운명에서 점점 현실과 이상이 괴리되어 가는 것이다.


명분만을 중시하며 민족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는 정파인 서인세력은 이후 노론과 소론, 벽파와 위정척사파 등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청이 명을 멸망시키고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한 1644년 이후에도 끊임없이 청에 대한 공격과 명에 대한 은혜를 주장하며 ‘허상의 세계’를 추구한다. ‘코리아의 악순환’을 강화한 이들은 ‘코리아의 운명’에서 세종의 계보와 정반대에 위치한다.





[출처 : 청와대브리핑   http://www.presiden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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