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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학【美學】

<한옥미학 6> 장경

by 禱憲 2010.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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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

마당과 여닫이문이 만들어내는 풍경, 장경

장경(場景) 혹은 장경주의는 “경치를 하나의 특별한 장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장’은 멍석을 깔아놓은 구경거리나 연극을 올려 공연이 벌어지는 무대이다. 풍경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인공적 형식을 강하게 가하겠다는 의도를 갖는다. 차경에서 ‘빌린다’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볼거리를 ‘제대로 폼 나게’ 꾸민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남에게 보여주자는 것은 아니다. 집안 일상생활에서 즐기는 풍경작용의 종류를 다르게 만들려는 다양화가 목적이다. 차경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생기는 법, 형식적으로 꾸며낼 필요가 생기게 마련이다.

 

나와 풍경 사이에 상당한 밀접함이 유지되면 차경이 되고 이 범위를 넘어서면 장경이 된다. 내가 풍경에 감정이입을 실어 풍경과 동질감을 가질 수 있고 풍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이쪽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풍경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으면 차경이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고 걸어 나가면 바로 풍경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내가 풍경과 한 공간 안에 있다는 느낌이 유지되면 차경이다. 풍경은 감상보다는 직접 경험의 대상에 더 가깝다.

 

 

윤증고택 사랑채 여닫이문을 열면 액자가 3차원 공간이 되
면서 나와 풍경요소 사이에 무대 같은 인공 형식이 꾸며진다.
나는 풍경과 한 몸으로 섞이지 않고 나만의 세게에 침잠할 수 있다.

하회마을 북촌댁 솟을대문 피지배계층이 솟을대문을 통해
들여다보는 반가의 풍경작용 역시 계급의 위계와 공동체의
동질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장경은 다르다. 이보다 훨씬 인공적이고 형식적이다. 나와 풍경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면서 다른 세계에 있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 연극에서 객석과 무대 사이의 거리감이 좋은 예이다. 요즘이야 관객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기도 하고 배우가 객석으로 내려오기도 한다지만, 전형적인 기준에서 보면 이런 일은 사고가 된다. 두 영역 사이에는 지켜야 하는 형식과 예절이 있다. 관객이 무대를 자신들이 사는 세계와 분리된 다른 세계로 느낄 때 무대 위 연극세계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것을 풍경에 적용하면 장경이 된다.

 

거리와 형식이 관건인데, 거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마당이고 형식을 갖추는 것은 여닫이문이다. 물리적 거리감은 기본 요소이다. 거리감은 곧 이격(離隔)이다. 떨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이격을 만들기 위해 액자와 풍경 요소 사이의 거리를 여백으로 비워두어야 한다. 풍경요소가 액자 속에 꽉 차 있으면 나와 같은 차원에 있는 것으로 느껴지지만 둘 사이에 마당이나 공간 같은 틈과 여백이 생기면 풍경은 그만큼 멀게 느껴진다. 한옥에서 마당을 비워둔 데에는 바람을 이용한 환경조절 같은 과학적 이유도 있지만 장경을 즐기려는 감성적 이유도 있다.


창의 종류에서는 액자에 공간 깊이를 주는 여닫이문이 제격이다. 여닫이문을 반쯤 열면 두 장의 문짝이 일소점 투시도 작용을 일으켜 액자가 3차원 공간 깊이를 갖게 된다. 관찰자와 풍경 요소 사이에 공간 켜가 하나 만들어진다는 의미이다. 이것만으로도 풍경은 무대 위에 올려진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미닫이문이 가세해서 양쪽 끝에서 여닫이문을 조금씩 먹고 들어오면 틀이 하나 더 추가되면서 액자는 완전히 무대 세트로 변한다.

 

 

여기와는 다른 세계의 풍경

장경은 나를 온전히 독립적 상태로 놔두고 싶을 때 알맞은 풍경작용이다. 주변 환경과 섞이지 않고. 나 이외의 타자를 관조의 대상으로 보겠다는 태도이다. 풍경은 손을 뻗어도 만질 수 없고 풍경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관객이 무대 위로 올라가면 판이 깨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풍경에 동화되는 직접 경험이 부담스러워 풍경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을 때 여닫이문을 열어 풍경에 무대형식을 가하면 된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싶을 때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채에서 디테일에 이르는 많은 구성요소들이 급하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한옥에서 요소들 사이에 숨통을 터주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미닫이문과 여닫이문이 같이 있으면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미닫이문만으로 풍경을 조절하면 차경이 일어나 풍경과 주관적 일체가 일어난다. 나를 잠시 잊고 풍경과 어울려 하나가 된다. 나와 주변을 포함한 더 큰 장을 정의할 수 있고 나는 그것의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그만큼 나를 ‘죽일 수’ 있다. 반대로 나의 존재감을 느끼고 혼자 있고 싶을 때에는 여닫이문을 사용해서 장경을 만들면 된다. 풍경은 가까이 오지 못하고 저만큼 멀리 떨어져 객관적 형식으로 남는다. 미술관에서 벽에 걸린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이원화로,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이것이 한옥에서 미닫이문과 여닫이문을 같이 두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규설 대감가 사랑채 빈 마당은 나와 풍경요소 사이에 거리감을 주어 장경을 만든다.주인마님의 공간과 아랫것들의
공간 사이에 계급의 위계를 유지하게 해준다.

 

 

개인적 이유 이외에 사회적 목적도 있다. 건축 구성요소나 집안 구성원들 사이에 형식적 거리감이 필요할 때이다. 사랑채 대청에서 일어나는 장경작용은 가부장제 아래에서 집주인이 집 전체를 감시하는 기능을 갖는 점에서 사회적 목적에 해당된다. 대감마님은 사랑채 대청에 앉아 집안 전체를 관조하듯 감상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늘 확인한다. 이런 작용은 쌍방향이어서 지위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가문을 대표하는 가장으로서의 책임도 늘 각성하게 해준다. 권위와 책임만으로는 불완전하다. 가족으로서의 사랑과 동질감도 필요하다. 사랑채 대청과 행랑채 사이에는 사회적 형식미에 따른 위계질서가 표현되기는 하지만 서양의 경우보다 그 차이가 적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대청이 행랑채에 대해 활짝 열림과 동시에 둘을 가르는 마당이 휴먼 스케일을 유지함으로써 관찰자와 풍경요소가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는다. 타자를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남으로 남게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타자와 같아질 수는 없으나 타자와 나, 즉 객체와 주체를 하나로 묶어 ‘우리’라는 공동체로 발전시킨다.

 

 

피지배 계층과 선을 긋다

사랑채 이외에 장경 작용이 많이 일어나는 곳은 솟을대문인데, 한옥이 반가의 주거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조선시대 양반은 주변지역에 대해 상당히 높은 단계의 지배권을 갖는 지역의 통치자였다. 반가는 주변 농가와 대비되어 통치자의 권위와 위계를 과시할 사회미로 무장해야 했는데 솟을대문이 이 기능을 담당했다. 장경작용에 수반되는 분리와 동질화의 양면적 기능은 여기에 적합했다. 바깥 세계와 일정한 분리를 이루어 반가 자신에 독립성을 줌으로써 권위를 지킴과 동시에 주변 마을과 동질화를 이루어 공동체의식을 형성하고 화목을 도모하는 양면작전을 구사한 것이다.

 

 

충효당 사랑채 계급 위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마당거리를 좁히고 건축형식을 동질로 하면 장경이라도 손을 잡아끌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서애다운 어질음이다.

 

 

솟을대문에서는 사랑채나 중문간채 등의 집안 전경이 풍경요소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행랑마당이 장경작용에 필요한 거리를 확보해준다. 솟을대문은 여닫이문 가운데 제일 크기 때문에 형식성이 유난히 강한 액자이며 장경작용에 필요한 조건인 인공다움을 잘 만족시킨다. 솟을대문이라는 액자를 통해 들여다보는 양반집 풍경은 정녕코 무대 위에 잘 올려진 인공 세트, 즉 장경을 보는 것 같다. ‘아흔아홉 칸’ 양반집의 규모와 복합 구성, 그리고 몇 단계는 더 높은 위계의 건축형식 자체만으로 피지배계층에게는 계급 차이를 보여주려니와, 이것을 연극무대처럼 ‘폼 나게’ 형식화까지 했으니 복종심이 절로 우러났을 법하다.

 

사랑채에서와 마찬가지로 솟을대문에서도 장경은 위압적이지만은 않다. 장식을 절제하고 적절한 휴먼 스케일로 나눠진 겸양의 미덕은 그대로 풍경요소의 겸손함이 된다. 풍경요소에 가해진 적절한 분절처리는 전체 분위기에 분산적 여유를 주며 구성미와 율동감 등을 통해 친근감을 유발한다. 중간에 휴먼 스케일의 마당이 들어가 적절한 거리감을 주면서도 너무 멀지 않게 느껴지게 한다. 솟을대문을 통해 들여다보는 대감댁 전경은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일뿐더러 자신들의 집과 닮은 점이 있는 것을 보고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대감댁은 더 이상 영원히 넘볼 수 없는 성전이 아니다. 심미화의 감상 대상이 되면서 상징기능에서 해지된다. 솟을대문 자체도 아담하려니와 그것을 통해 들여다보는 집안 전경은 지배계층의 권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평화로운 풍경화 한 폭을 보는 것 같다.

 

 

 

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동서양을 막론한 건축역사와 이론을 주 전공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명비평도 함께 한다. 현재까지 3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공부로 익힌 건축이론을 설계에 응용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jyimis@empas.com
[출처]네이버캐스트 :: 오늘의 집 > 한옥미학   2010.03.29.   http://navercast.naver.com/home/koreanstyle/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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