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학【美學】
<한옥미학 14> 다양하게 변하는 공간
by 禱憲
2010. 8. 1.
한옥의 공간은 무상하다. ‘상’이란 ‘항상 그렇단’ 뜻이니 무상은 ‘항상 그런 상태가 없다’는, 즉 ‘한 가지로 고정된 상수의 상태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한옥의 공간은 ‘항변’한다. 한옥이 유교문명의 지배계층을 위한 반가이지만, 항변하는 공간의 특징에는 노장과 불교의 사상이 베어들어 있다. 무상이라는 개념이 이미 노장사상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을 공간에 적용시키면 ‘비움’의 가치가 된다. 무언가 꽉 차 있으면 변하기 힘들고 한 가지로 고정되어 버린다. 무상 공간을 낳은 불교 사상은 ‘불이(不二)’이다. 둘로 나누는 통상적 편 가름을 거부한다. 공간에 적용시키면 안과 밖, 방과 마당, 이쪽과 저쪽이 서로 다른 둘이 아니라 서로 같은 하나라는 뜻이 된다. | |
서울 민형기가옥 중문과 내외문이 담을 끼고 퇴와 합했다. 몸체의 덩어리를 면과 선이 가르는 형국이다. 건축형식이 다양하니 기하학적 조합이 뛰어나다. |
비움과 불이는 벽의 가변성으로 얻어진다. 한옥은 나무기둥이 구조역할을 담당한다. 벽은 고정되지 않고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벽마저 딱딱한 고형 상태로 굳히는 서양건축과 달리 한옥에서 벽은 자유롭게 변할 수 있다. 문이 그 비밀이다. 문의 면적을 가급적 늘린다. 벼락치기 문이라는 기발한 형식도 있다. 이 문을 달 경우 뼈대만 앙상하게 남기고 벽을 다 털어버릴 수도 있다. 기둥마저 나무라는 자연재료이기 때문에 이런 투명한 느낌을 돕는다.
문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통(通)’의 길을 낸다. 바람 길을 내는 것이 목적이지만 결과적으로 막힘없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쪽에 문을 내면 저쪽에서 구멍이 마주 보며 대응하는 것이 보통이다. 들여서 막다른 길로 모는 실례를 범하지 않는다. 들어오면 뒤돌지 않고 나갈 수 있다. ‘통’은 길이니 ‘모’로도 난다. 긴 꼬치 하나에 이것저것 꿴 것처럼 방과 문, 문과 벽, 급기야는 공간과 공간을 일직선에 달고 사선으로 뻗어나가는 축이 있게 마련이다.
공간 얼개가 자유롭다. 문이 유난히 많다. 밖을 면한 외벽은 물론이고, 대청이나 안마당을 면한 안쪽도 마찬가지다. 벽을 털어버리기 위한 것이지만, 그 전에 공간 얼개를 가능하면 다양한 상태로 만들기 위함이 먼저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조합에 따라 경우의 수는 다양하게 증가한다. 마당까지 합세하면 머리로 헤아릴 범위를 넘어선다. 채를 중심으로 여러 켜의 공간이 앞뒤로 중첩되다가, 다시 마당을 기준으로 이런 채가 중첩된다. 방이 안이고 마당이 밖임을 굳이 구별할 이유가 사라진다. 통하고 돌고 도니 불이이다. | |
- 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 동서양을 막론한 건축역사와 이론을 주 전공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명비평도 함께 한다. 현재까지 3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공부로 익힌 건축이론을 설계에 응용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jyimis@empas.com
[출처]네이버캐스트 :: 오늘의 집 > 한옥미학 2010.05.23.
http://navercast.naver.com/home/koreanstyle/27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