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학【美學】
<한옥미학 16> 바로크
by 禱憲
2010. 8. 1.
분산적 풍경작용의 종점, 바로크
서양의 예술 형식을 기준으로 했을 때, 규칙적이고 정형적인 형식을 대표하는 표현이 ‘르네상스답다’는 것이다. ‘x-y-z'축의 3차원 질서가 반듯하게 지켜지고 개체의 모습도 본래 생긴 꼴을 잘 유지한다. 동일한 요소가 반복되면서 균형과 안정을 지킨다. 이것의 반대가 ’바로크‘이다. 불규칙적이고 비정형적이며 파격이나 변화를 추구한다. 형태가 왜곡되고 좌표 질서도 깨진다. 동일성보다는 차이가 조형적 미덕이 된다. 한옥은 법도를 바탕으로 한 유교시대 지배계층의 주거이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르네상스다워야 맞다. 언뜻 보면 르네상스다워 보이기도 한다.
내막은 그렇지 않다. 한국인의 국민성은 둘 중 고르라면 바로크에 가깝다. 그래서 유교문명은 잘 맞지 않았다. 조선의 유교문명이 한국인에게 행복한 시대였는지의 여부는 또 다른 논제이므로 여기서 감히 꺼낼 얘기는 아니다. 한옥이라는 건축형식만 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규범과 법도의 질서 속에 무궁무진한 다양성을 숨겨 놓은 것만은 확실하다. 목적은 놀이기능이다. 딱딱하고 엄격한 유교의 법도 속에서 숨 쉴 돌파구를 마련해놓은 것으로 보고 싶다. 한국인의 국민성으로 보았을 때, 대감님이나 안방마님이라고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평생을 늘 반듯한 몸가짐만으로 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빠져나갈 구멍은 집에 있었다. 다양한 놀이기능을 숨은 질서로 슬쩍 집어넣어 겉에서는 들키지 않으면서 집 안에서 즐기며 놀 수 있게 했다. 겉으로 규범을 잘 좇으면서 속으로 키메라처럼 다양하게 변하는 내재적 질서를 숨긴 집은 세계에서 한옥밖에 없다. | |
창덕궁 연경당 액자와 풍경요소는 심하게 조각 나 소품이 되었다. 이것들을 모아서 큰 그림을 그리는 일은 무의미해 보인다. |
이런 놀이기능의 정점에 바로크가 있다. ‘몽타주-콜라주-바로크’의 세 경우가 분산적 풍경작용을 이루는 핵심인데, 몽타주는 좀 더 규칙성에 치중한 경우이고 콜라주는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한 경우이며 바로크는 분산성 쪽으로 넘어간 경우이다. 콜라주와 바로크는 외견 형식만 보면 유사하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콜라주가 개별요소의 총합을 완성된 상태로 굳혀서 보려는 데 반해 바로크는 계속 변화 중에 있다. 동양미학으로는 변화무쌍과 기운생동이 서양식 바로크 개념에 해당한다. 창덕궁 연경당을 보면, 액자는 개수를 세기가 힘들 정도로 분산되었다. 분산이 일어난 방향도 축 질서를 딱히 정하기 힘들다. 마치 살아서 꿈틀대는 유기체의 생명작용을 보는 것 같다. 조각 난 풍경요소를 모아서 전체 스토리를 만드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그냥 조각 난 상태 그대로 즐겨야 할 것 같다.
바로크의 조건들 : 소품화, 축 질서 깨기, 낯설게 하기
창덕궁 연경당이 만들어낸 장면은 ‘소품화’로 정의할 수 있다. 바로크가 일어나기 위한 중요한 전제 조건이다. 개별요소가 전체 장면을 독점하는 비율이 작아져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의 풍경요소만으로 이루어지는 장면은 그만큼 안정적이 되어서 분산적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동시에 개별요소에 대한 전체 질서, 즉 조형규범이 약해져야 한다. 반복, 통일성, 비례 등 조화를 추구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조형규범인데, 이런 질서에서는 바로크가 나올 수 없다. 바로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전체 질서가 개별요소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별요소가 하나씩 떨어져 따로 놀아야 된다. 이를 ‘소품화’로 정의할 수 있다. 심하게 얘기하면, 갈가리 찢어지고 조각 나야 된다는 뜻이다. 단순히 개수만 많아서는 안 된다. 조각을 모아 바느질을 하고 짜 맞추어도 원래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를 말한다.
액자와 풍경요소의 개수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공간 구도도 중요하다. 십자 축 질서가 깨진 경우도 바로크가 일어나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집이 삐딱하게 기우는 경우가 대표적이지만 한옥에서 이런 경우는 없다고 보면 된다. 이럴 경우 유교적 법도를 대놓고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당연히 허용이 안 되었을 것이다. 그 대신 다른 기법을 숨겨서 쓴다. ‘十’을 이루는 네 팔에 창을 불규칙하게 뚫을 뿐 아니라 그 창 속에 보이는 장면도 제각각으로 만든 다음 하나로 합하는 방식이다. 향단 을 보면, 네 팔 가운데 세 곳에 문을 냈는데 위치, 크기, 형태, 개수 등을 조금씩 다르게 했다. 각 창 속에 보이는 풍경장면들도 서로 큰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서로들 바로 옆에 있지만 협심할 의지는 약해 보인다. 집 전체의 구도가 급하게 붙어있기 때문에 액자를 뚫고 봐도 조화롭고 통일된 질서가 잡히지를 않는다. | |
향단 십자 축 질서의 골격은 유지되지만 축을 이루는 각 팔들에서 일어나는 풍경작용은 제각각이다. 이것들을 모아 놓으면 바로크가 된다. |
또 다른 독특한 바로크 작용으로 ‘낯설게 하기’를 들 수 있다. 수애당 사랑채를 보면, 화면은 양분되어 있는데 둘은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인다. 다른 집의 장면을 가져와 이어놓은 것 같다. 왼쪽에서는 창호지가 햇빛을 받으면서 ‘창 스스로 풍경이 되기’가 일어난다. 오른쪽은 족자와 자경이 일어나고 있으며 보기에 따라서는 장경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크다울 수 있는 이유는 이 둘이 ‘뜬금없이’ 병렬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립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으나 ‘이질요소의 병렬을 통한 낯설게 하기’로 정의할 수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대립성도 느껴진다. 왼쪽은 실내장면을 대표하면서 오른쪽의 실외장면과 대립된다. 실내장면은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데 실외요소는 오히려 빛이 인색하면서 우울해 보인다. 실내외 사이의 이런 전도는 초현실성으로 읽힌다. 실외는 밝은 빛으로 가득차고 실내는 차분하다는 현실의 상식을 뒤엎는 점에서 그러하다. | |
수애당 그로테스크한 초현실성은 상식을 깨는 의외성을 일으킨다. ‘낯설게 하기’를 통한 바로크 기법이다. |
한국적 상대주의를 건축적으로 형식화하다
왜 집에서 이런 바로크 작용이 일어나게 했을까. 한 마디로 한국적 국민성을 대표하는 상대주의를 건축적 형식으로 구현한 것이다. 한국적 민족성 가운데 개별성과 임의성에 기초한 상대주의가 여기에 해당된다. 한국인들은 세상사를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개별 요소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이 과정에서 세상만물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구성형식은 여러 갈래로 분화된다. 처음부터 하나로 주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갈림길이 대표적 구도이며 이것을 합리화하는 정서적 개념이 여정이다. 인생을 나그네길, 즉 여정에 비유한 개념이 좋은 예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 힘의 무기력함과 이것이 모여서 형성되는 사람살이의 무상함을 인정한다. 이것에 대항해서 극복하기보다 순응해서 살기를 좋아한다. | |
김동수 고택 세 겹 중첩에 의한 바로크의 정수를 보여준다. |
이것은 결국 ‘질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이다. 서양식 실용주의는 일직선으로 잘 정리된 질서를 추구하지만 한국적 국민성은 이것에 거부감을 갖는다. ‘우르르 몰려서 대강대강 되는대로 비벼대다 보면 그런대로 일은 돌아가게 되어 있다’라는 것이 한국인의 질서 개념을 요약한 것이다. 이런 차이는 수형도로 환산해보면 다시 명확하게 드러난다. 서양식 줄서기를 수형도로 그리면 큰 줄기 하나에서 작은 가지가 갈라져 나오는 형국이다. 큰 줄기는 사람이 세운 질서이다. 이것은 규칙의 개념으로 사회에서 중심에 위치한다. 반면 한국식 줄서기를 수형도로 그리면 큰 줄기가 없이 작은 가지만 여러 개 얽힌다. 선험적 규칙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해결함으로써 사회질서가 유지된다고 믿는다.
서양식 절대주의나 근대적 효율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무질서로 비판받을 수 있다. 근대화가 덜 된 재래적 잔재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식 질서 개념이 인간 본성에 더 가까운 것 또한 사실이다. 생명의 활력에 의해 항상 살아서 움직이는 활성이 인간의 본성에 제일 가까운 상태인데 이것을 인공질서로 제약하려는 것은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런 활성은 ‘개체의 자유’의 밑바탕을 이루는 원초적 조건이다. 이런 세계관이 한옥에서 건축적 형식으로 구체화된 것이 바로크라는 풍경작용인 것이다. | |
- 향단
조선 중기의 가옥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위치. 조선 중종(中宗) 때의 문신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경상감사로 부임한 1540년에 지어졌다고 전한다. 원래는 99칸이었으나 화재로 불타고 51칸이 남아 있다. 전면의 한층 낮은 곳에 동서로 길게 9칸의 행랑채가 있고 그 후면에 행랑채와 병행시켜 같은 규모의 본채가 있다. 그 중앙과 좌우 양단을 각각 이어서 방으로 연결하여, 전체 건물이 마치 ‘日’자를 옆으로 한 것 같은 평면이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격식과 품격을 갖추면서, 주거문화의 합리화를 꾀한 공간구성이 돋보인다.
- 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 동서양을 막론한 건축역사와 이론을 주 전공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명비평도 함께 한다. 현재까지 3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공부로 익힌 건축이론을 설계에 응용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jyimis@empas.com
[출처]네이버캐스트 :: 오늘의 집 > 한옥미학 2010.06.03.
http://navercast.naver.com/home/koreanstyle/27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