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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땅【地】

천연기념물(속리의정이품송, 운문사의처진소나무, 합천묘산면의소나무)

by 禱憲 2007.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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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소나무


― 속리의 정이품송(俗離의 正二品松),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雲門寺의 처진 소나무), 합천 묘산면의 소나무(陜川妙山面의 소나무)


 

 

 

 

 

 

△ 속리의 정이품송(俗離의 正二品松) ― 천연기념물 제103호

◇ 종목 : 천연기념물 제103호

◇ 명칭 : 속리의 정이품송(俗離의 正二品松)

◇ 수량 면적 : 1그루 7,700㎡

◇ 지정일 : 1962년 12월 3일

◇ 소재지 :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상판리 17-3

◇ 소유자 및 관리자 : 법주사 / 보은군

◇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이가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이 소나무가 정이품송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조 10년(1464)에 왕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어 가마가 가지에 걸리게 되었다. 이에 세조가 “가마가 걸린다”고 말하니 소나무가 자신의 가지를 위로 들어 왕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 세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리하여 세조는 이 소나무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정이품(현재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고, 그래서 이 소나무를 정이품 소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살아오는 동안 각종 재해를 입었는데, 특히 1980년대 초 솔잎혹파리의 피해 때문에 많은 비용을 들여 대규모 방충망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 소나무는 원래 삿갓 또는 우산을 편 모양으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는데, 1993년 강풍으로 서쪽 큰 가지가 부러져 그 모습이 많이 상하였다.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다우며, 크고 오래된 나무이어서 생물학 및 생물유전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고, 임금에게 섬기는 그 시대상을 잘 전해주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문화적인 가치 또한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수령(樹齡)은 600여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4.5m, 가슴높이의 둘레가 4.77m이다. 가지의 길이는 동서가 13.70m이고, 남북이 17.28m이다.


이 곳 속리의 정이품송은 천연기념물 노거수로서 용문사의 은행나무와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이 소나무는 법주사로 들어가기전 약 3㎞되는 지점에 서 있고 그 주변을 지나는 도로가 있다.


이 소나무는 수관이 우산을 편 모양으로 정제하고 무척 아름답다. 사방으로 고루 퍼진 곁가지가 알맞게 아래로 드리우고 있다. 불행하게도 1993년 봄에 폭풍이 불어 곁가지 하나가 절단되어 대칭적인 수관에 흠집을 낸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 나무는 다음과 같은 전설을 안고 있다. 즉 1464년(甲申年) 세조대왕(世祖大王)이 법주사로 행차를 하실 때 대왕을 태운 가마가 이 소나무의 아랫가지에 걸리게 되자 이 소나무는 그 가지를 쳐들어 어가(御駕)를 무사히 통과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이 소나무를 "연(輦)걸이 소나무"로 부르기도 한다. 또 대왕께서 이곳을 지나다가 비를 피했다는 말도 있다. 왕이 큰 소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전설은 중국에도 있긴 하다. 이러한 사연으로 해서 대왕께서는 이 소나무에 정이품(正二品)(현재의 장관급의 위계)의 벼슬을 내리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나무를 정이품소나무로 부르고 있다. 이 소나무가 서 있는 앞마을의 명칭이 진허(陣墟)인데 이것은 그당시 대왕을 호위하던 군사들이 진을 치고 머물렀다는 데서 생긴 지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일이 약 440년전에 있었던 것이라면 이 소나무의 수령은 약 600년 정도로 추정될 수 있다.


이 소나무는 옆을 흐르는 계류가 퇴적시킨 사질 양토위에 서 있는데 이러한 토성은 수분조건, 공기조건 그리고 토양 미생물의 번식 등 소나무에 적합해서 이 소나무가 그간 건강하게 오래 살아 올 수 있었다고 짐작된다.


이 소나무는 그간 줄기 아랫쪽 일부가 부패해서 외과시술을 받은 바 있으며 1980년경부터 우리나라 남쪽에서 소나무를 가해하면서 올라온 솔잎혹파리의 침범이 이곳에 이르자 1982년에는 높이 18m에 이르는 8각주형(角註形)의 철골시설물을 세우고 이에 방충망을 설치해서 솔잎혹파리의 침입을 차단했던 것이다. 이것이 큰 효과를 발휘해서 소나무는 솔잎혹파리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는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우리국민의 나무사랑의 지극함이 국내외로 전해졌다. 이 방충망시설은 큰 비용부담과 또 솔잎혹파리의 해가 없을 것으로 판단되자 1991년에 철거시켰다. 그 뒤 정이품송의 수세회복을 위한 연구용역 및 보호사업을 실시하고 있으나 워낙 나무의 나이가 오래되었고 해서 앞으로 왕성한 생리의 회복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雲門寺의 처진 소나무) ― 천연기념물 제180호

◇ 종목 : 천연기념물 제180호

◇ 명칭 :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雲門寺의 처진 소나무)

◇ 수량 면적 : 1그루 241,631㎡

◇ 지정일 : 1966년 8월 25일

◇ 소재지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68-7

◇ 소유자 및 관리자 : 운문사

◇ 처진 소나무는 가지가 밑으로 축 처진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매우 희귀하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운문사의 앞뜰에서 자라고 있으며 높이는 9.4m, 둘레는 3.37m이다.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한때 반송(盤松:키가 작고 밑동부터 가지가 옆으로 퍼지는 소나무)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이 나무는 3m 정도의 높이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본다. 운문사는 1,400년 전에 지었다고 하고 임진왜란(1592) 때 이 나무는 상당히 컸었다하니 나무의 나이는 약 4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 처진 소나무는 고승(古僧)이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꺾어서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스님들은 매년 봄·가을에 뿌리 둘레에 막걸리를 물에 타서 뿌려주는 등 정성을 다하여 가꾸고 있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답고, 전형적인 처진 소나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며,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수령(樹齡)은 약 400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9.4m, 가슴높이의 둘레가 3.37m, 밑둥둘레가 3.70m이다. 수관폭은 동-서 22.2m, 남-북 24.3m이다.


소나무의 일품종(一品種)으로 가지가 축처진 수종(樹種)이다. 지상(地上) 3m 높이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지주(支柱)로써 지탱되고 있다.


현재(現在) 이 나무의 수형(樹形)이 아주 좋아서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감탄이 나오게한다고 한다. 이 나무의 건강을 위하여 매년 봄 가을에 걸쳐 막걸리를 한말씩 물에 동량(同量)으로 타서 뿌리 가장자리에 준다는 것이다.


운문사(雲門寺)가 1400년전에 지어졌다 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 나무는 상당히 컸었다하니 상당히 오래된 나무라고 사료되고 고승(古僧)이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꺾어서 심었다는 구전(口傳)이 있기도 하다.


 

 

 

△ 합천 묘산면의 소나무(陜川 妙山面의 소나무) ― 천연기념물 제289호

◇ 종목 : 천연기념물 제289호

◇ 명칭 : 합천 묘산면의 소나무(陜川 妙山面의 소나무)

◇ 수량 면적 : 1그루 256㎡

◇ 지정일 : 1982년 11월 4일

◇ 소재지 :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835외 1필

◇ 소유자 및 관리자 : 합천군

◇ 합천 묘산면의 소나무는 해발 500m 정도 되는 곳에 위치한 화양리 나곡마을의 논 가운데 서 있으며 나이는 5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17.7m, 둘레 6.15m의 크기로 가지는 2.5∼3.3m 높이에서 갈라져 다시 아래로 처지 듯 발달하였는데 그 모습이 매우 독특하고 아름답다. 나무 껍질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고 가지가 용처럼 생겼다 하여 구룡목(龜龍木)이라고도 한다.


연안 김씨의 후손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광해군 5년(1613)에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고 역적으로 몰려 3족이 멸하게 되자 김제남의 6촌벌 되는 사람이 도망와서 이 나무 밑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마을을 지켜주는 나무로 여기고 오랫동안 보호해 왔으며, 민속적·역사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수령(樹齡)은 약 500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7.7m, 가슴높이 둘레가 6.15m, 뿌리 근처 둘레가 6.8m, 가지 밑의 높이가 3m이고, 수관폭은 동-서 25.2m, 남-북 24.5m이다. 해발(海拔) 500m 정도의 고지(高地)에서 자라는 고립목(孤立木)이며 마을앞에 있다.


조선조(朝鮮朝)때 김제남(金悌男)(1562-1613)은 그의 딸이 선조의 계비(繼妃)가 됨으로써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를 제수 받고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613년(광해군 5년)에 이이첨(李爾瞻) 등이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한다는 무고를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김제남(金悌男)이 역적(逆賊)으로 몰려 삼족(三族)이 멸(滅)하게 되자 그의 재종제(再從弟)되는 사람이 화(禍)를 피하여 이 소나무 밑에 초가(草家)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김씨(金氏)의 후손(後孫)들과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전하고 있어 이 나무의 수령(樹齡)을 500년으로 추정(推定)하게 된 것이다.


이 나무는 또 한편 구룡목(龜龍木)이라고도 하는데 수피(樹皮)가 거북이 등같이 갈라지고 수형(樹形)이 용같이 생겼다고 부르는 이름이다.




[출처 : 문화재청 문화정보센터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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